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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 Feb 12. 2024

일상으로의 초대- 갈비찜

세상 어디에서도 못 느끼는 맛




갈비찜은 명절 음식이다. 매 설과 추석, 일 년에 두 번은 꼭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인데 때로는 단점이기도 하다. 언제든지 먹고 싶은 게 갈비찜일진대 '명절 음식'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탓에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은 아니라는 그릇된 편견(?)이 생겨버렸다. 진정 슬픈 일이다. 달콤짭짤한 맛있는 갈비를 왜, 김치찌개나 제육볶음처럼 아무때나 먹을 수 없는 것인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원재료 가격도 조리 시간도 다르니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갈비찜에게 이 노래를 바치고 싶다.



내게로 와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새로울 거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신해철, <일상으로의 초대>



새로운 무언가를 내 삶으로 들여놓은 뒤로 '모든 게 달라졌다'라고 느낀 적이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 봐도 정말 극적인 변화를 느꼈던 경험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낯선 장소에 다녀오고, 유용한 물건을 들이고, 취미생활을 시작하고, 새로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모두 당시에는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고 한동안 행복했지만 내 인생의 근본적인 영역을 바꾸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래도록 남을 소중한 추억이 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근래에는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너무나 많아진 탓에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는 감상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말 그대로 도장을 찍듯이 경험을 '수집'하고, 어떤 일을 '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여 각각의 사건에서 내가 무얼 인지하고 발견했으며 생각이 바뀐 점은 있는지 돌아볼 시간이 사라진 듯싶다.


내 경우에는 일기를 쓰면서 그때그때의 내 기억과 감정과 생각을 겨우 떠올려 보곤 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추억으로, 인생의 중요한 지점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순간들을 놓칠 것만 같아서다. 이런 감각을 느끼는 건 감흥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지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전이 두렵고, 더 나은 사람으로 나를 변화시키고 싶은데 그게 너무 힘겹고 부담스럽다. 계속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해지기도 하고 할 일도 고민도 쌓여간다. 이거 혹시, 새해 증후군 같은 건가. 새해의 시작과 함께 발현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과 그동안 미뤄왔던 많은 일들에 대한 막막함, 이번에는 꼭 실천하겠다는 다짐이 또 무너지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 한번에 밀려오는 것이다.


갑진년 새해가 밝으면서 또 수많은 다짐을 했다. 반은 쉽게 해 볼 수 있는 것들이고, 반의 반은 꾸준함과 인내와 담대함을 요구하는 일이고, 나머지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도 해내기 어려운 일들이다. 1월 1일에 적어둔 목표를 계속 읽있자니 부담감만 심해져 덮어버렸다. 일단 잔뜩 적어 둬야 조금이라도 지킨다면서 내린 결과였다. 계속 상기해야 실현에 가까워지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할 일의 목록을 자꾸 들여다보는 건 스트레스만 누적시킨다. 머리가 아파와서 생각을 멈춰야 했다. 부엌에서는 맛있는 갈비 양념이 끓는 냄새가 살랑살랑 흘러오고 있었다.


그랬지. 연휴를 간절히 기다린 것은 갈비찜 때문이었다. 떡국은 신정에 먹었지만 갈비찜은 으레 음력 설에 맞추어 먹기 때문에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자책과 후회는 잠시 잊자. 고대하던 연휴, 식탁의 주인공은 단연 푹 끓여 양념이 깊게 배어든 야들야들한 갈비찜. 뼈를 잡고 들어내면 부드럽게 고기가 분리된다. 걸쭉한 갈비 양념을 한 숟갈 떠서 갈비를 한 번 더 적셔주고 쌀밥과 함께 입에 넣으면 그 자체가 행복이다. 잘 익은 햇밤과 부드러운 감자, 색이 고운 당근도 골라 먹는다.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이토록 맛깔나는 갈비찜을 매년 만들어 주시는 어머니를 향한 감사함 내지는 존경심과, 미각 세포가 반응하는 원초적 즐거움이 교차한다. 우울함은 저 편으로 멀어지고 원기라는 것이 회복되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을 의지하진 않는다는 전제하에 음식은 최고의 항우울제다. 왜 나는 발전하지 못하는가? 라는 물음은 언제든 사람을 심연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위험한 것인데, 갈비찜을 먹는 순간 사르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이 까다롭고 복잡하고 깊이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갈비찜으로 단번에 기분을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구나. 어떤 면에서는 나도 단순한 사람일 수 있군. 그런 생각이 드니 더 편안해졌다.


새해의 울적한 생각으로부터 날 건져 올려주는 갈비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겠다. (갈비찜과 나의 창조주인 어머니에게도) 아쉽지만 일상으로의 초대장은 쓰지 않으려고 한다. 갈비찜을 내 일상으로 초대한다고 해서 모든 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자주 먹기 시작한다면 지금처럼 갈비찜을 맛있게 먹지 못하는 수가 있다. 익숙해지니까.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처음처럼 소중하게 대해 주지 못하는 게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다. 추석에 돌아올 갈비찜은 가을의 쓸쓸함에서 또 나를 구해줄 터다. 그러니까 살짝 모자라다 싶을 만큼 공간을 남겨둔다. 조금씩 아쉬움이 남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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