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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노 쌤 May 27. 2023

수면(水面)

세상과 나를 구분하는 경계가 있다.

가뭄이 심해지면 외가쪽 집안의 전화기가 바빠진다. 안동호 밑에 잠겨 있던 고향 마을이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를 핑계 삼아 서울, 대구, 충주 등으로 흩어졌던 일가족이 예안에 있는 작은 본가로 모인다. 수몰된 고향집으로 향하는 친척들은 안동호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50년 전 어린 시절로 돌아가 설렌다. 학교 가던 길, 옛 동무랑 놀던 놀이터, 집을 드나들던 옛집의 대문 등 훼손은 되었지만, 추억을 더듬는 이야기 꽃으로 모두의 머릿속에는 이내 옛 모습을 갖춘다. 수면 아래 잠겨 있던 고향 마을이 그나마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졸지에 실향민이 된 외가쪽 친지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도 이제는 낯설어지고 있다. 외삼촌, 외숙모, 이모, 이모부가 수몰된 고향을 남겨두고 하나둘씩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시간을 이길 장사는 없는 법이다. 안동호 수면 아래, 그 시절 어린 소녀였던 어머니의 추억은 여전히 살아 뛰어다니고 있으련만......


이제 농촌은 여름을 앞두고 농번기로 접어들고 있다. 농부는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 준비에 한창이다. 그래서인지 옥연지로 흘러드는 하천의 수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수위는 조금씩 계속 낮아져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수면 아래 세상이 시나브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전 마을 사람들이 이동했을 길이며,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지켰을 나무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드러난 호수 가장자리 바닥에는 해캄이며 물풀과 같은 부유물이 조금은 역한 물냄새를 풍기며 썩고 있다. 옥연지는 수면 아래로 숨겨 두었던 치부가 드러나면서 부끄럽고 무안했던 모양이다.

2주 전과 비교해 보면 옥연지로 흘러드는 물이 눈에 띄게 줄었다.

2023년 5월 22일 월요일

어김없이 한 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월요일에는 늘 그렇듯 기상과 함께 교통 정체를 걱정해야 한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서 신천대로를 거쳐 북대구 IC로 진입해 화원 IC로 빠졌다. 지난봄 벚나무가 만들었던 분홍색의 꽃터널은 이제 짙은 녹색 터널로 바뀌어 있었다. 혼잡한 도로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심신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녹색의 터널로 진입하면서 차분히 가라앉았다.  

옥연지에는 지난주 시작된 비탈면 보강 공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계단 초입 작업대에서 작업자가 검은 부직포 주머니에 모래를 가득 넣고 케이블 타이로 입구를 단단히 묶었다. 다음 작업자는 계단 높은 곳으로 모래주머니를 올려놓았다. 또 다른 작업자는 수레에 이것들을 실어 공사장까지 옮겼다. 그중 요령이 부족한 젊은 작업자가 모래주머니의 케이블 타이를 잡고 들어 올리면서 주머니가 풀렸다. 노련한 작업자는 바로 다른 케이블 타이로 꺼내어 입구를 단단히 묶었다. 다행히 모래는 거의 흐르지 않았다. 어린 작업자는 멋쩍은 듯 머리를 숙이며 미안함을 표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재된 능력은 갑작스러운 상황 대처 과정에서 수면 위로 드러나는 법이다.

봄의 끝자락을 지키고 있었던 꽃들도 이제 작별할 때가 되었다.

2023년 5월 23일 화요일

큰 잉어나 배스가 더 이상 놀 수 없을 정도로 물이 빠졌다. 낮아진 수위로 생긴 작은 물웅덩이에서 백로와 해오라기가 유유히 먹잇감을 노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송해공원 표지석 주변에는 새로운 화분이 들어왔다. 화단은 이미 다양한 식물로 포화상태였다. 새로운 식물을 심을 공간은 더 이상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심으려는 것일까? 공원 주차장 입구 쪽에 지난주부터 공사 차량이 비탈면을 깎고 평탄화 작업을 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넓은 장소에 심기에는 화분의 양이 턱 없이 부족했다. 또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놓아둔 밴치로 판단해 보면 화단을 조성할 장소는 아닌 듯했다.


2023년 5월 24일 수요일

송해공원 표지석 주변 화단에 작업자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화단의 경계면을 따라 봄의 끝자락을 지키고 있던 데이지, 루피너스 등을 제거하고 있었다. 작업자에게 "아직 싱싱해 보이는데요"라고 말하니, "이제 교체할 때가 되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여성 작업자는 그 빈자리에 아직 꽃대도 올라오지 않은 어린 식물을 심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기존의 것은 버려야 한다. 길을 지나가던 아주머니는 손에 화분 하나 들고 있었다. 작업자에게 부탁해 얻은 모양이었다. 이제 곧 아주머니의 집에도 작은 여름 꽃이 하나 피어날 것이다. 호숫가 산책로에도 붉은 빛깔의 탐스러운 뱀딸기가 여기저기 익어가고 있었다. 계절은 또다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송해공원 연못의 낮아진 수위로 인해 수련의 꽃봉오리가 설 곳을 잃어버렸다.

2023년 5월 25일 목요일

송해공원의 연못에는 이미 5월 초순부터 수련이 피고 있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수련은 수면 아래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며 밝고 아름다운 꽃을 수면 위에 띄운다. 연꽃과 구별되는 점이다. 옥연지 수면이 낮아지면서 송해공원 연못의 수위도 함께 낮아졌다. 낮아진 수면으로 인해 수련이 다소 난감해졌다. 이미 꽃대를 물 깊이만큼 내었는데, 꽃과 잎을 띄울 수 있는 높이의 수면이 사라졌다. 수련이 아름다울려면 적절한 깊이의 수면이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수련을 보려면 비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화단 작업에서 수거된 꽃들이 마대 자루에 담겨있었다. 작업 차량은 이것을 어디론가 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바라건대 작은 씨앗이라도 수확하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일이 늘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다.


2023년 5월 26일 금요일

송해공원 주차장 입구 쪽에 잔디를 잔뜩 실은 트럭이 들어왔다. 화단 작업 때보다 많은 작업자가 잔디를 차량에서 내리고 있었다. 내려진 잔디 뭉치들은 다시 황토색 흙을 드러낸 경사면의 가장자리로 옮겨졌다. 여성 작업자들은 잔디를 분리하고 비탈면에 붙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긴 경사면에 잔디를 다 붙이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는 고된 작업일 것이다.

옥연지로 유입되는 시냇물의 흐름이 완전히 멈췄다. 드러난 하천 바닥으로 신이 난 꼬마물떼새 여러 쌍이 뛰어다니며 여기저기를 탐색하고 있었다. 눈 주변에 노란 동그란 선을 가진 귀여운 모습으로 강바닥을 스케이트 타듯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생물은 다양하다. 그 생물이 사는 자연도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꼬마물떼새에게는 바닥을 보인 하천이 반가운 듯 보였다.

산책을 하다 보면 수면으로 얼굴만 내밀고 있는 거북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인기척에 이내 물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녀석들은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수면을 관찰하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기포, 갑자기 물 밖으로 도약해 수면파를 만드는 잉어, 물속으로 물고기를 사냥하기 위해 다이빙하는 가마우지의 모습 등 다양하고 신기한 광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일렁이는 수면의 변화는 그 아래에 펼쳐지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샘솟게 한다. 검푸른 수면의 물결 커튼을 걷어내면, 판타지 같은 물속 세상을 환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아니면 상상 이상의 대단한 광경을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난 늘 옥연지의 수면 아래가 궁금하다.

욕심에 수면으로 날아든 나방은 둥근 수면파를 만들 뿐이다.

하늘을 날던 나방 녀석이 물속 세상이 궁금했는지 수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호수면으로 떨어진 나방은 수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버둥대고 있었다. 금단의 세상을 탐하려 한 죄 값을 치르고 있는 듯했다. 나도 가끔 경계를 넘어 다른 세상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감히 그 속으로 풍덩 뛰어들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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