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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노 쌤 Jun 06. 2023

머묾

영원할 것만 같은 삶도 잠시 머무는 순간의 연속이다.

생명은 태어나 성장한다는 특징이 있다. 성장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 현재 몸은 과거 내가 섭취한 영양소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몸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나의 몸을 구성하는 많은 물질은 잠시 내 몸에 머물다가 나를 떠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잠시 그 형태를 가지고 있을 뿐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세상의 규칙이다. 그러므로 내 몸에 내재된 자아도 어느 순간 사라질 운명이다. 인생은 잠시 머물다가는 여행이다. 주어진 시간이 다가오면 다시 별의 부스러기로 돌아가야 한다.


송해공원의 다리 건너에 있는 사계공원 뒤로는 꽤 넓은 주말 농장이 있다. 주말농장에서 농사일을 하는 경작인을 아침에는 잘 만날 수 없다. 아주 가끔 나이가 지긋하신 노부부 정도가 아침부터 농장을 방문하곤 한다. 대부분 머무르는 시간은 짧다. 하지만 주말농장의 농작물은 쑥쑥 자라고 있다. 조그마하게 구획된 조각보 같은 땅에는 다양한 농작물이 심겨 있다. 파, 상추, 오이, 가지, 호박 등 그야말로 농산물 집하장이다. 잠시 머물다가 갔을 뿐이었지만 훤히 비어있던 농장은 시나브로 생명으로 가득 채워졌다.

자연은 늘 새롭게 태어난다.

2023년 5월 30일 화요일

옥연지로 흘러드는 유량이 엄청 늘었다. 석가탄신일 연휴 기간 동안 비가 많이 내렸기 때문이다. 수련이 열심히 만들어 놓았던 꽃봉오리는 높아진 수위로 인해 물속에 잠겼다. 다행히 꼿꼿하게 자란 노랑어리연꽃의 꽃봉오리는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며 만개를 준비하고 있었다. 송해공원의 연못에는 몸에 잔뜩 물방울을 단 잠자리가 제대로 날지 못하고 잔디 위에 앉았다. 태양만 고개를 내밀어 준다면! 그렇게 기다리던 비도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되어버렸다.


2023년 5월 31일 수요일

오래간만에 만난 아침 햇살은 반가웠다. 내린 비로 처져 있던 꽃들은 생기를 가득 품고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태양은 모든 꽃에게 향기로운 색을 입히고 있었다. 여름을 대표하는 수국과 접시꽃이 피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침 산책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이 시기가 지나면 아침 산책도 무더위에 힘겨워질 것이다. 송해공원에 야자매트와 경계석을 실은 큰 트럭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를 내릴 크레인도 들어왔다. 공원 산책로를 지키던 야자매트도 이제 새로 교체될 것이다. 5월을 상징하던 장미도 이제 지친 듯 새로운 꽃에게 계절을 양보하고 있었다.

핑크색의 배로니카가 하늘을 향해 꼬리치고 있었다.

2023년 6월 1일 목요일

사계공원에서 검둥이를 만났다. 몇 달 전 돌보던 새끼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검둥이는 나를 쓱 훑어보았지만, 예전처럼 짖지는 않았다. 내가 가는 방향으로 잠시 따라오다가 조용히 집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가는 검둥이의 축 늘어진 배가 눈에 들어왔다. 새끼가 부모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것도 자연의 순리다. 송해공원의 입구에는 교체될 새로운 야자매트가 여러 개 내려져 있었다.


2023년 6월 2일 금요일

지난봄 벚꽃과 함께 공원을 물들였던 복숭아나무에서 작은 열매가 많이 떨어졌다. 아직은 풋복숭아다. 하지만 마트에는 이미 완전한 복숭아 출하가 시작되었다. 송해공원에서는 하얀 솜털 풍선 같은 열매를 잔뜩 달고 있는 민들레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둑을 훑고 지나가는 단 한 번의 바람으로, 씨앗은 하늘로 붕 떠올랐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영원한 이별이었다. 민들레에게 씨앗은 온 우주였을 것이다. 정성껏 길러낸 씨앗도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헤어짐은 한순간이었다.  

불어오는 단 한 번의 바람으로도 우리는 헤어진다.

아버지는 어릴 적 할아버지 모습을 자주 이야기해 주셨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매우 아끼셨다. 할아버지 옆은 항상 어린 손자의 차지였다. 할아버지는 천식을 앓으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기력을 북돋울 밥상을 정성성을 다해 차리셨다. 할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늘 영양가 있고 맛난 반찬은 손자의 입으로 들어갔다. 겨울이면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와 화톳불 앞에서 오손도손 시간을 보내셨다. 야산에서 가져온 밤이며 암탉이 낳은 달걀 같은 군것질 거리도 손주의 몫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할아버지와 한 번의 인사도 없이 그렇게 영원히 헤어지셨다.


구순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는 유년시절을 마치 어제 일처럼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내신다.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증조할아버지를 80년이라는 시간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 그렇게 재회한다. 모든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 혼재된다. 우리는 일장춘몽 같은 인생의 시간에 잠시 머물 뿐이다. 그러기에 삶의 순간은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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