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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노 쌤 Jul 09. 2023

순간 포착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준비가 필요하다.

재미있는 영화와 지루한 영화의 상영 시간은 다르게 느껴진다. 러닝타임이 2시간 42분인 '아바타'나 2시간 27분 '어벤저스 엔드게임'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너무 빨리 끝나 다음 편을 기약해야 하는 아쉬움까지 들었다. 삶의 시간도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어린 시절, '6백만 불의 사나이'는 극장에서 본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외화다. 그날은 설날이었다. 한 자리에 모인 어른들은 갈 곳 없는 조카들을 위해 큰 누나를 필두로 극장표를 끊어 주셨다. 어두운 극장의 중간 위치, 한 라인을 모두 차지한 우리는 스크린에 등장한 주인공의 모습에 집중했다. 영화 후반에는 쇠사슬로 온몸이 꽁꽁 묶인 6백만 불의 사나이가 정신을 잃고 나무 상자에 갇혀 목숨을 위협받는 장면이 나온다. 정신을 차린 주인공은 엄청난 힘으로 쇠사슬을 끊고 상자를 부수며 뛰어나왔다. '뚜두두두' 쇳소리 음향효과와 함께 시작되는 슬로모션은 시선을 한 곳으로 끌었다. 6백만 불의 사나이는 느린 동작으로 순식간에 악당을 제압했다. 어린 시절 짧은 집중력에도 6백만 불 사나이의 장면은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있다. 


생명이 위협 받을 정도의 사고 순간에는 사람의 뇌리에 과거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그것은 뇌가 가장 빠른 속도로 현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경험의 순간을 찾는 과정이다. 빠른 시간에 여러 장면을 떠올리다 보니 짧은 순간이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마치 슬로 모션처럼 말이다. 


어떤 순간은 기억에 평생 남고, 어떤 순간은 기억에서 금세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제각기 특별한 순간이 존재한다. 그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면 아프고 쓰라린 순간이 된다.

낚시꾼은 배스의 순간 움직임을 포착해 낚아 올렸다.

2023년 7월 3일 월요일

송해공원 입구에 들어서면서 낚싯대를 챙기는 젊은 연인이 보였다. 아침부터 낚시와 함께 데이트를 즐길 터였다. 7월의 첫 주 월요일! 배스 낚시 행사가 있는 날이다. 지난 주에 비가 많이 내렸지만, 앞으로 있을 계속된 비소식에 옥연지 수위를 낮게 유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듬성듬성 드러난 모래사장까지 낚시꾼들이 들어갔다. 구름 낀 아침 날씨는 낚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공원의 연못 둔턱에는 2명의 작업자가 제초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가슴 장화와 긴 고무 앞치마까지 입고 모자와 팔토시까지 완전 무장이었다. 등에는 예초기를 메고 긴 예초기로 둔턱 주변으로 자란 풀들을 가차 없이 잘랐다. 잘려나간 풀 조각은 작업자의 앞치마에 스프레이로 물감을 뿌린 듯 잔뜩 묻어 있었다. 습하고 더운 아침에 그런 복장으로 작업을 하는 것은 극한 직업이다. 작업자의 얼굴에는 땀이 흘렀고, 수건은 땀에 젖어 있었다.  

낚시꾼과 작업자는 월요일이란 시간을 사뭇 다르게 지내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나도 다른 이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지 모르겠다.


2023년 7월 4일 화요일

화원 IC로 나와 공원 입구 오르막에 접어들 때, 확실한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노랫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매미가 울기 시작한 것이다. 송해공원의 사계 정원 쪽에는 아직 매미가 울지 않았다. 다만 하늘 위로 여름을 알리는 잠자리들이 단체 비행을 하고 있었다. 

잠자리는 이미 여름의 중턱을 지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2023년 7월 5일 수요일

높은 구름과 청명하게 갠 하늘은 아침 출근길 기분을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사계정원의 활짝 핀 큼지막한 꽃들은 햇빛을 받아 한층 곱게 빛나고 있었다. 옥연지 수위는 오늘도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다. 새들이 좋아하는 수면 위 나뭇가지로 시선을 집중하며 조용히 걸었다. 이때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파란색의 작은 새가 눈에 확 들어왔다. '우와~'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억누르며 카메라를 들었다. 물총새였다! 줌으로 당겨 물총새를 카메라 파인더 속으로 빨아들였다. 이럴 수가! 결정적 순간, 초점이 안 맞았다. 초점을 다시 잡으려는 순간, 그 짧은 순간을 못참고 물총새는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조심 나무 숲의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때 물총새가 나무 숲을 돌아 반대편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았다. 이런 행운이! 이번에는 실수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에 떨리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고쳐 잡았다. 다행히 초점이 한 번에 잡혔다. 물총새의 파란 등짝을 찍을 수 있었다. 오호라! 이 녀석은 고개까지 이리저리 돌리며 포즈를 취했다. 심지어 몸을 180도 회전해 뒤돌아 정면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10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는 사이 뷰파인더에서 물총새가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얼른 물총새가 앉은 자리를 응시했다. 이때 물총새는 슬로 모션으로 다이빙하여 물고기를 사냥한 후 부리에 물고기를 문 상태로 다시 나뭇가지로 돌아왔다. 불행히 나의 카메라는 이 순간을 포착할 수는 없었다. 나의 눈에 잡힌 이 과정은 순간이었지만, 사진 대신 나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물총새는 새가 사는 세상으로 나를 초대한 고마운 생명체다.

2023년 7월 6일 목요일

"혹시 오늘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아침 출근길이 설레었다. 사계정원으로 넘어가는 다리 위에서 어제보다 수위가 더 낮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위가 낮아져 호숫가에는 물 웅덩이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었다. 어제 녀석을 본 장소로 천천히 다가섰다. 하지만 나의 기대감은 그냥 기대감일 뿐이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생기지 않는다. 나를 위로하듯 오랜만에 쇠딱따구리가 나무에서 부지런히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2023년 7월 7일 금요일

주말 큰 비가 예고되어 있어선지 옥연지 수위는 엄청 낮아졌다. 1년 중 가장 낮은 수위로 보였다. 물속에 잠겼던 길과 계단 그리고 물속에 넣어두었던 수련 화분까지 전부 모습을 드러냈다. 공원의 연밭에는 꽃봉오리 수가 점점 늘고 있었다. 방둑에는 참나리도 활짝 피었다. '나리'는 백합의 우리말이다. 참나리는 꽃잎 무늬가 표범 무늬를 닮아 호랑이꽃이라고도 부른다. 주말 농장 주변에는 호박꽃이 노랗게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꾀꼬리와 뻐꾸기는 한 번도  포착의 순간을 주지 않으면서 계속 숨바꼭질하듯 잘 찾아보라며 숲속 저만치에서 울어댔다. 

하천의 방둑에는 참나리가 활짝 피었다.

물총새를 찍었다는 기쁜 소식과 미흡한 카메라 장비에 대한 아쉬움을 SNS에 남겼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진을 전공한 죽마고우 녀석이 이 글을 읽고 댓글을 남겼다. "새에게 관심이 늘면 곳간이 너덜난다. 좋은 쌍안경이나 관측용을 사서 그저 즐기세요." 그렇다. 욕심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항상 큰 제물을 바란다. 순간을 가지려는 집착은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금전적 투자까지 요구할 것이다. 옥연지도 물에 욕심내지 않고 가지고 있던 많은 양의 물을 비우고 있었다. 삶의 균형은 비움과 채움으로 조절된다. 


내가 눈으로 경험한 물총새의 사냥 장면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것이다. 오늘도 많은 순간이 나를 스쳐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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