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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노 쌤 Jul 01. 2023

제색(霽色)

비 개인 하늘처럼 자연에는 스스로 제 모습을 찾는 생명력이 있다.

6월 25일. 한국전쟁은 이미 70년이 흘러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상처는 한반도 곳곳에 남겨져 있다. 한민족이었던 남과 북은 휴전선을 경계로 여전히 대치하고 있다. 이 분단 상황은 대한민국을 외교 무대에서 제 기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약자로 만들었다.


평안도의 대동강 하구 작은 마을인 갈천이 아버지의 고향이다. 고향에서 아버지는 넉넉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해방 이후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사라지셨고, 할머니는 한 참 후에 할아버지가 남쪽에 계신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어렸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월남을 감행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판문점 인근에 도착했다. 그 시기 이곳에는 남쪽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가 있었다. 낮에는 군인의 눈을 피해 갈대밭에 숨어 있었다. 해가 지고 달빛도 자취를 감춘 칠흑 같은 밤이 되자 할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38선을 넘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그어진 휴전선은 더 이상 그 누구의 왕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향에 단 한 번도 돌아갈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전후 세대로 태어난 나에게 친척이란 '친가'가 빠진, 그저 '외가'를 지칭하는 단어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비로 인해 산책로에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생겼다.

2023년 6월 26일 일요일

한밤중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억수같이 퍼붓던 비로 잠까지 설쳤다. 다행히 비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조금 잦아들었다. 월요일인 데다 비까지! 기상과 동시에 아침 출근길이 걱정이었다. 걱정은 현실로 나타났다. 송해공원으로 이어진 모든 구간이 막혔다. 월요일과 비의 시너지효과는 컸다. 공원에 도착해서도 제법 비가 내렸다. 하천을 따라 호수로 유입되는 수량이 많았다.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이 고인 다리를 건너 꽃이 만발한 사계공원에 들어섰다. 공원에서 이어지는 산책로에는 빗물이 차 있었다. 들어찬 물로 나와 송해공원 사이에 장벽이 생겼다. 오늘 산책은 공원의 꽃과 송해공원의 운무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23년 6월 27일 화요일  

다행히 비가 그쳤다. 빗물로 세수한 태양도 구름 사이로 말끔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습도로 산책이 상쾌하지만은 않았다. 기온은 걷기 좋을 정도였지만 옷은 자꾸 몸에 달라붙었고, 목덜미에 땀까지 흘렀다. 옥연지에는 상류 쪽에서 떠내려온 개구리밥이 호숫가를 따라 녹색 띠로 남았다. 흙탕물과 호숫물 사이에는 색의 경계가 뚜렷했다. 나와 달리 송해공원의 생물들은 활기찼다. 며칠간 내린 비로 굶주렸을 벌, 나비, 잠자리 등 각종 곤충이 분주히 날아다녔다. 참새, 방울새, 할미새 등도 땅을 뛰어다니며 먹이 사냥에 정신이 없었다. 늘 빠르게 날아다녀 사진에 담기 힘들었던 호랑나비, 제비나비도 꿀을 빠는데 정신이 팔렸는지, 다양한 포즈를 취해 주었다. 비 개인 공원에서 나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호랑나비, 긴꼬리제비나비, 네발니비, 암끝검은표범나비(암컷), 배추흰나비(암수 짝짓기)등 송해공원은 나비 세상이었다.

2023년 6월 28일 수요일  

밤새 내린 비가 출근길까지 이어졌다. 우산을 쓰고 산책을 나섰다. 옥연지로 유입되는 수량은 계속 늘고 있었다. 옥연지 수위도 기존의 높이까지 차 올라왔다. 다행히 산책길은 물에 잠기지 않았다. 산책로 초입에는 주말농장에서 흘러내린 진흙으로 질퍽하고 미끄러웠다. 산책길 중간에도 진흙 구덩이가 생겼다. 맨발로 걷는 사람들에게는 진흙길이 발을 부드럽게 감싸는 원초적 자극을 줄 것이니, 비로 만들어진 진흙길이 반가울지 모르겠다. 산책길 대부분은 마사토다. 나는 웅덩이를 걱정하지 않고 자연을 감상하면서 걸을 수 있었다. 내리는 비로 공원을 화려하게 수놓던 아름다운 나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빗속을 뚫고 참새만 짹짹거리며 날고뛰고 심지어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2023년 6월 29일 목요일

화원 IC에서 송해공원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평소와 다르게 정체가 진행되고 있었다. 두 길이 하나로 합쳐져 병목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송해공원의 입구 쪽은 한 번도 막힌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제3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길에서 공원의 중간 부분까지 도로포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 길은 늘 작은 웅덩이인 포트 홀로 불편했었다. 포장 공사로 5분 정도 시간이 지체되었다.

사계공원의 산책 바닥도 새 흙으로 덮였다. 보강공사가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빗물로 산책로에 작은 골이 여러 개 만들어졌었다. 비가 그친 사이에 흙과 돌로 이 골들을 메우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화단에는 배추흰나비가 아침부터 분주히 날고 있었고, 길에는 참새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옥연지 주변 수풀 사이에는 뱁새가 숲 쪽에는 직박구리가 시끄러웠다. 산책길을 걸으며 나의 시선은 호수면 위로 올라온 죽은 나뭇가지 사이에 멈췄다. 갈색의 작은 새가 등 쪽에 작은 두 개의 흰 반점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급히 카메라 줌을 당기면서 파인더에 눈을 가져갔다. 그 순간 피사체로 기대하지 않았던 새파란 새가 눈에 들어왔다. 물총새다. 가능한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사진이 찍히고 다시 파인더가 리셋되었을 때, 물총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충분한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내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2023년 6월 30일 금요일

다시 비가 내렸다. 장마라는 단어에서 비 내리는 날씨는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천을 따라 상류에서 내려오는 빗물은 옥연지를 향해 물안개까지 일으키며 기세 좋게 몰려들었다. 빗물을 따라 논에서 자라던 개구리밥이 또 왕창 떠내려왔다. 개구리밥을 필두로 누런 황톳물이 뒤를 따랐다. 갑작스러운 유입은 옥연지 수면에 뚜렷한 경계를 남겼다. 물총새는 "삑~ 삑~" 높고 짧은소리를 내며 수면 위를 낮고 빠르게 날고 있었다. 사계 공원 아래로 펼쳐진 모래밭에는 꼬마물떼새가 침입자의 침입을 잔뜩 경계하며 울고 있었다. 둥지 근처로 멧비둘기가 날아온 것이다. 꼬마물떼새는 포란 중인 듯했다. 침입자가 날아가자 잠시 날아오른 듯하다가 내려앉아 둥지 쪽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알을 관찰하고 싶은 욕심은 들었지만 생명체 간의 경계는 필요한 법이다. 나는 그 자연에 대한 예를 갖추기로 했다. 

자연에는 적절한 경계가 필요하다.

자연에서 다양한 나비를 만나려면 꽃밭에 앉아 꽃을 감상하고 있으면 되고, 새를 찍으려면 거리를 두고 기다리면 된다. 가끔 사진작가 중에는 자연을 훼손해 가면서까지 작품을 남기려 욕심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욕심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자기 존재를 위협하는 독이 된다. 잠시 서로를 인정하고 예를 갖추면 하나가 될 수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여름철 지루한 장마 기간에도 생명은 약동한다. 내린 비로 공원에는 많은 경계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자연의 경계는 자연을 갈라치지 않는다. 그냥 일부이다. 변화를 변화로 받아들이며, 경계는 비가 그치듯 다시 사라진다. 자연은 변화를 포용하고 하나로 만든다. 자연은 작은 변화들을 참고 기다린다. 인간의 헛된 욕심으로 발생하는 기후 변화도 자연이 다시 생명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부다. 자연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제모습을 찾아가려는 하나의 생명체다. 


세상은 여전히 한 가족의 재회를 허락할 용기조차 없다. 이런 우리가 자연을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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