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마음에 남는 곳은 바로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을 잡고 1년 반 가량을 지낸 동네 Lewes (루이스)입니다. 런던에서 남쪽으로 선을 죽 내려 그으면 나오는 바닷가 도시 Brighton (브라이튼), 그리고 그 브라이튼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작은 도시가 바로 루이스입니다.
도시 중간에는 옛 루이스 성과 그 성을 둘러싼 언덕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집들과 집들 사이를 메우고 있는 크고 작은 공원과 숲. 루이스는 첫인상부터 참 정감 가는 도시였습니다. 특히 도시 경계를 따라 펼쳐진 하얀 절벽과 강 그리고 멀리 보이는 푸른 언덕들은 도시를 한 층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중산층과 상류층이 모여사는 곳이라 도시는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때문에 밤에 산책을 나가도 위험하지 않습니다. 영국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그런 '안전함'이 루이스에 살 적에 참 좋았습니다. 런던 그리고 Gatwick Airport (게트윅 공항)과 잘 연결된 기차 편이 있어 런던에 일이 있거나 해외로 나갈 일이 있을 때 편리한 점도 정말 좋았습니다.
깨끗한 메인 스트릿을 따라 자리한 아기자기하고 감성 있는 가게들. 조금만 걸어 나가면 있는 다양한 숲 그리고 언덕 산책로. 15분만 운전하면 갈 수 있는 Seaford의 예쁜 바닷가와 하얀 해안 절벽. 아내와 얘기하며 훗날 영국에 정착하게 된다면 루이스에 살면 좋을 것 같다고 서로 얘기했습니다.
런던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날씨도 런던이나 다른 영국의 동네들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맑은 날이 런던 근방에 비해서는 두 배, 영국 북쪽에 비해서는 네 배는 많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 정도 날씨면 영국이라도 살아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체감상 99%의 주민들이 토종 영국인이라는 점 (3대가 영국인인 참 영국인). 아무래도 외국인이 드문 곳이다 보니 우리가 정착해서 살기에는 국제 커플로써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얀 오리들이 만연한 곳에 검은 오리는 따돌림받기 쉬우니까요. 영국 문화를 정말 좋아하면 그나마 영국인들과 어울려 볼 수 있겠으나 아내와 저 둘 다 영국 문화에 큰 애정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자식들도 학교에서 외지인 취급을 받으며 겉돌지도 모를 일이구요. 그래서 아무래도 도시가 좀 더 글로벌 해지지 않는 이상 루이스에 정착하는 것은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사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담으로 국제 커플로써 정착할 곳을 생각해 볼 때 그 도시의 외국인 비중을 많이 생각합니다. 외지인이 많은 곳일수록 외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발달해 있다는 걸 호주에서 느꼈으니까요. 99%의 하얀 오리들 사이에 있는 1%의 검은 오리 입장이 되는 것과 60%의 하얀 오리들과 40%의 다양한 색의 오리들이 지내는 곳에 끼는 건 전혀 다릅니다. 또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다양성이 풍부한 곳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며 상처받지 않고 크길 바라기에 도시의 외국인 비율과 외지인을 대하는 태도는 저희에게 몹시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실 현지인 입장에서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끼어들어 지내려는 외지인이 못 마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도 전혀 할 말이 없지요. 자기 나라는 뒤로하고 다른 영역에 와 염치없이 끼어 살려는 게 맞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런 염치없는 입장임에도, 제 자신과 가족의 행복이 중요하기에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참된 영국인들의 도시 루이스, 좋은 곳이라 머물고 싶으면서도 우리가 머묾으로써 도시의 색을 흐릴 수 있기에 조심스러운 곳.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마음 한편에 좋은 곳으로 간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