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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파리 패션 브랜드에서 인정받기

2018년 8월, 파리

by 다립


파리에 정착하는 동안 소슬했던 계절들이 지나고, 어느새 유럽 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여름이 찾아왔다.

프랑스는 ‘바캉스의 나라’라는 말답게 여름만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남부로, 혹은 인접국으로 긴 휴가를 떠난다. 레스토랑부터 회사, 심지어 관공서까지 모두 문을 닫아 도시가 텅 비는 걸 보면,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서 휴가철 파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쥬 직원들 역시 최소 2주에서 길게는 한 달씩 휴가를 떠났지만, 인턴인 나에게 주어진 휴가는 한 달에 고작 하루. 남들처럼 여유로운 여름휴가는 애초에 꿈도 꿀 수 없었다.


바캉스 시즌이 본격화되면서 여름의 파리는 한적했고, 우리 사무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마쥬의 유일한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나의 상사 Zak마저 휴가를 떠나면서, 사실상 회사에 필요한 모든 디자인 업무를 내가 맡게 되었다. 까다롭고 예민한 프랑스인들이 전부인 패션 회사에서 나 같은 동양인이 적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떤 집단이든 꾹 참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이 구성원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때가 온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시기가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Zak이 없는 상황에서도 브랜드는 굴러가야 했기에 SNS, 매장, 글로벌 마케팅, 오프라인 행사 등 디자인이 필요한 상황은 계속 생겨났고, 그때마다 전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온갖 타 부서에서 찾아온 사람들을 대면하게 되었다. 상사의 커버 없이 단독적으로 일을 받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디 가서 디자인으로 아쉬운 소리를 들었던 사람은 아니었기에, 한국인이 자랑하는 빠릿빠릿한 속도로, 최선을 다해 원하는 요구사항들을 반영해 작업했고, 나름 깔끔한 마무리와 일처리들이 반복되자 좋은 피드백들이 쏟아졌다. 처음 만난 직원과 인사하고 이름을 말했을 때 '아 그게 너구나'라는 말을 들을 때나, 주변에서 내 얘기를 많이 전해 들었다며 새로운 미션을 들고 찾아오는 타 부서 직원들을 볼 때면, 그들이 직접 표현은 안 하지만 '내가 사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구나'라는 걸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입사 후 초반 몇 달간은 Zak의 밑에서 그의 작업을 보조해 주는 역할로 그쳤었지만, 어느새 점점 나는 단독으로 모델촬영, 캡슐 컬렉션 의상 촬영, 새로 이전하는 마쥬 오피스 소개 영상, 매장 직원 교육용 영상, 책자 작업, SNS 포스팅 등 제법 굵직굵직한 작업들을 도맡게 되었고, 프로젝트 자체도 의미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고 함께 만들어간 시간들이 특히 더 값진 기억으로 남는다. 처음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동양인 인턴에게,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찾아와 프로젝트를 설명해 주고, 내가 말하는 의견들을 하나하나 경청해 주고, 작업한 결과물들을 소개했을 때 너무 흡족해하면서 고마워하던 모습들. 그렇게 나는 어느새 마쥬의 한 일원이 되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몇 주 뒤, Zak이 휴가에서 돌아온 후에는 내 인턴 기간 중 가장 큰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었던 마쥬 20주년 F/W 컬렉션 글로벌 포스터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20주년을 맞아, 마쥬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모델들을 초청하여 인터뷰를 진행하는 패션 필름과 룩북을 촬영했고, Yearbook (졸업앨범)의 콘셉트로 컬렉션을 선보였다. 내가 맡은 일은, 이러한 에셋 (asset: 사진, 그래픽 등 디자인에 필요한 소스 자료)들을 가지고 전 세계 마쥬 매장에 걸리는 라이트 박스 포스터를 제작하는 일이었고, 100여 개의 글로벌 매장에 각기 다른 사이즈에 맞춰 전부 하나하나 새롭게 작업을 해야 하는 강도 높은 노가다 과정이었지만, 내가 함께 참여하여 작업한 이미지들이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매장에 걸린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찬 일이었다. 그렇게 프랑스의 모두가 긴 휴가를 즐기는 동안, 내 첫 파리에서의 여름은 누구보다 뜨겁고 바쁘게 흘러갔다.


대형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이제는 전보다 편해지고 익숙해진 팀원들과 잠시 숨을 돌릴 즈음, 한국에서 재영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가 제작하고 있는 게임이 인디 게임 페스티벌에 선정작으로 뽑혔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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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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