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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굿바이, 파리

2018년 11월

by 다립


뜨겁고 치열했던 파리에서의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선선한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늘 외롭기만 했던 파리 생활이었지만, 그 사이에는 제법 즐겁고 반짝거렸던 순간들이 있었다. 7월, 러시아에서 열린 2018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우승을 차지했다. 파리에 사는 친구들과 스포츠 펍에서 그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고, 'On est champion (우리가 챔피언이다)'를 외치는 환희 가득 찬 프랑스인들과 삼색국기가 파리 전역을 뒤덮었다.

그해 나는 프랑스 나이로 서른 살이 되었고, 내가 일하는 마쥬는 20번째 생일을 맞았다. 20주년을 맞이한 마쥬는 부서별로 곳곳에 흩어져있는 개별 오피스들을 합쳐 파리 중심에 있는 커다란 건물로 이사를 했다.

루브르 미술관 바로 옆, 역사적인 마랭고 길 (Rue de Marengo)에 자리한 이 건물에 마쥬의 모든 직원은 두 층을 사용하며 통합되었고, 웅장하고 럭셔리한 쇼룸 공간을 자랑하는 이 오피스는 후에 넷플릭스의 프랑스 드라마 'Dix pour cent (한국 제목: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의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매일 아침 Rivoli역에서 파리의 직장인들 틈에 섞여 출근하고, 역사적이고 아이코닉한 공간에서 패션 일을 한다는 것은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일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자부심과 만족감을 주었다. 거대한 쇼룸에서 촬영을 하고, 스타일들이 만들어지는 과정들을 보고, 마쥬의 창업 디자이너인 Judith Milgrom과 최고 경영자 Isabelle Guichot를 만나 얘기를 나눠본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예전에는 나에게 큰 관심이 없던 내 매니저 Zak과도 어느새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 매일 수업 뒷자리에 앉은 고등학생처럼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고, 서로 낄낄되며 일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크리에이티브함은 나에게 큰 귀감이 되곤 했는데, 캠페인이나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세이프존에서 벗어나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실험하고 테스트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뉴욕에서 중요한 손님들이 왔을 때, 그를 만나며 '당신이 말로만 듣던 마쥬의 전설적인 디자이너군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고 새삼 그가 얼마나 실력 있는 디자이너인지 실감이 갔다.


매일매일 출근길이 기다려지고 설레는 나날이었다. 마쥬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Zak과 그의 사이드킥(?) 인턴의 호흡은 최상이었고, 날아다니는 우리 둘을 보며 타 부서원들은 '그래픽 스튜디오'라며 농담을 건네며 여러 프로젝트들을 건네왔다.

그저 순탄하기만 하던 내 회사생활에도 딱 한번 위기가 생길 뻔한 적이 있었는데, 새로운 소셜 커뮤니케이션 매니저가 부임했을 때였다. 이전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던 매니저는 굉장히 (파리 패션회사에서는 드물게)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로 콘텐츠를 기획할 때마다 늘 내 생각을 물어봐주고 내 업무량을 세심히 배려해 주면서 작업을 맡기곤 했다. 하지만 새로 입사한 매니저는 초반이라 그랬는지 굉장히 의욕이 앞선 편이었고, 전후맥락 없이 엄청난 양의 작업들을 무식하게 맡겨버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Zak이 약간의 커버를 쳐주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고, 무리한 작업들을 마구잡이로 맡기는 불도저 같은 그녀 때문에 평화롭던 마쥬에서의 리듬은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틀정도 휴가를 다녀온 뒤 사무실에 출근을 했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Zak에게 물어보니 인스타 업로드에 큰 이슈가 발생해 디렉터에게 고함을 듣고 그대로 회사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한번 고용이 된 직원을 자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녀는 아직 수습기간이었고, 무엇보다 늘 냉철하지만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던 팀의 디렉터, Yves가 사무실에서 고함을 질렀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무튼 나의 마쥬에서의 유일한 '위기(?)'였던 존재는 그렇게 짧게 마무리되었다. (사실 그녀가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주가 돕는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11월이 되었다.

어느새 공기는 차가워지고, 퇴근길에도 쨍쨍하게 떠 있던 여름의 해가 서서히 일찍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월은 마쥬에서의 내 인턴계약 마지막 달이었다. 인턴일을 병행하며 어렵게 개발을 완료했던 인디게임이 해상도 문제로 점점 하향세를 걷고, 계약종료 후 앞으로 어떻게 할지 뚜렷한 계획 없이 마지막 달을 맞이하던 어느 날,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눈의 양옆이 뿌옇게 보여 시야가 평소보다 굉장히 좁게 느껴졌고, 한 곳에 오래 초점을 맞추는 게 어려워졌다. 그리고 계속 눈이 시리고 뻑뻑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당시 나는 9시에 출근해 저녁 6시까지 일을 하고 그 사이 점심시간에는 계속 온라인으로 한국에 있는 팀원들과 게임 관련 회의를 하였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다시 책상에 앉아 게임 디자인 작업을 했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 터라 가능한 밤 12시를 넘기지는 않았지만 주말에는 새벽 3-4시까지 작업을 하기 일쑤였고,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시 일어나 노트북을 열고 작업을 해나갔다. 하루에 모니터를 바라보는 시간이 평균 12시간은 되지 않았을까? 이렇다 보니 눈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고, 더 이상 모니터를 바라보는 게 힘겨울 정도였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큰 재산인 눈에 무리가 오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걸 그대로 방관하면 큰일 나겠다 싶어 엄마에게 연락을 했고, 상황을 들은 엄마는 한국에 와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결국 인턴이 끝나면 한국에 들어가기로 결정했고, 나는 이번 귀국을 통해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 몸에 무리가 온 것도 있었지만 뚜렷한 계획 없이 해외에 나와서 석사 졸업, 그리고 파리에서 패션 브랜드 인턴까지.. 이 정도면 유학을 와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쥬에서의 마지막날.

마쥬에서는 한 직원이 회사를 떠날 때 마지막날에 팀에서 간단한 송별회를 준비해 주는 전통이 있다.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일수록 파티 규모도 크고 많은 부서에서 인사를 하러 오지만 인턴들은 속해있는 팀 단위 정도에서 조촐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실 고작 길어봤자 6개월이 전부인 인턴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리고 퇴근하기 1시간 전 내 송별회 시간이 왔을 때, Zak은 나를 불러 오픈 스페이스 공간으로 데려갔고 Zak을 따라간 그곳에서, 나는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모여있는 수십 명의 부서 팀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미지&마케팅 팀 전원을 포함하여 HR(인사) 팀, 커머스 팀, 프로덕트팀, 리테일 팀, 글로벌 CS팀, 프레스팀, 그리고 심지어 디렉터들까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마쥬에서 5년 가까이 있었던 한 매니저는 지금껏 인턴 송별회에 디렉터를 포함해 이렇게 만든 인원이 온 걸 본 적이 없다며 놀라워했고, 그들은 저마다 나에게 떠나는 게 아쉽다며 더 남아있으면 안 되냐고 농담 섞인 인사를 건넸다.

디렉터 Yves는 자신의 사무실 방으로 나를 따로 불러 지금까지 해준 많은 작업들과 노력에 감사한다며 자신에게도 좋은 영감이 돼주었다는 말을 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에서 볼듯한 전형적인 차갑고 예민한 패션 디렉터 이미지의 그가 이런 말을 해준 게 처음이라 놀라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Zak은 나에게 선물을 건네주었다. 쇼핑백 안에는 얼마 전 Zak이 쓰는 걸 보고 내가 부러워했던 에어팟이 들어있었다. 그때 그걸 기억하고 있었구나라고 생각이 들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모두에게 감사인사를 건네며 그렇게 나에게는 꿈만 같았던, 영화 같은 송별회와 마쥬에서의 모든 일상을 작별했다.


단지 해외에 나가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시작했던 나의 유학생활. 어느덧 벨기에에서 교수들의 찬사로 석사를 마치고, 파리에서 모두의 감사와 인사를 받으며 떠난 회사생활까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중했고, 평생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할 6개월을 뒤로하고, 나는 파리의 집과 짐들을 모두 정리했다. 정든 나의 16M2의 작은 단칸방. 지독하게 외로웠고, 연고 없는 파리로 돌아와 어떻게든 이 사회에 끼어 살아보려는 나의 노력들이 담겨있던 작은 공간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파리의 정든 장소들과 풍경들을 (시리고 뻑뻑한) 눈에 담으며, 나는 이곳에서 만난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건넸고, 11월 26일. 모든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IMG_0741 copy.jpg 월드컵 기간 동안 우리가 일하는 법. 왼쪽의 모자 쓴 남성이 내 매니저 Zak




IMG_2337 copy.jpg 내가 작업에 참여했던, 마쥬 20주년 캠페인




IMG_1960 copy.jpg 새로운 마쥬의 공간, 쇼룸




IMG_2713 copy.jpg 정든 나의 공간




IMG_2729 copy.jpg 마지막 메시지와 선물






Epilogue

파리를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2019년 3월. 나는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파리 루브르 미술관 옆 고급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함께 마주한 사람은 마쥬 E-커머스 팀의 디렉터, Carine이었다.

마쥬에서 인턴을 할 때도 거의 말을 나눠본 적이 없던 타부서의 디렉터가 나에게 먼저 연락을 주고 커피챗을 제안했을 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미팅을 마치고 급하게 온듯한 Carine은 우리 둘을 위한 커피를 주문하고 나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마쥬의 정식 웹디자이너로 일할 생각 있어?'


분명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파리에서, 나는 다시 또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고 있었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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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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