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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눈으로, 생각으로

아이들과 남은 시간 D-9년, 두 번째 이야기

by 스테디김 Mar 11. 2025

국립 박물관에서 ‘문화유산 그리기 대회’를 주최한다. 관내 초등학생 선착순 100명으로 진행되는 대회이다. 이름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화재 중 하나를 골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번 대회는 그동안 종종 참가했던 사생대회들과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가장 다른 점은 순전히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정해진 시간에 참가 어린이만 박물관에 입장하여 지도하는 선생님이나 학부모의 개입 없이 아이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야 한다. 좋은 자리를 잡아주고 물통에 물을 채워주고 햇살을 가릴 우산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 작품에서도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잡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 쓰며 오랜 시간 끌고 갈 수 있는 집중력이 더욱 필요하다.  


다행스레 서준이는 이런 작업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단시간에도 엉덩이를 들썩이는 공부와 다르게 그림을 그릴 때면 옆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와도(서준이는 엄청난 식탐의 소유자임을 감안하시길)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특이한 것인지(좋게 말하여 관찰력이 좋은 것으로..) 보통 사람들이 넘길 부분을 집요하게 그려내는 방식을 좋아한다. 나는 이것을 특별히 '내장 기법'이라 명명했는데 사소한 것을 내장 속까지 그려내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탱크의 바퀴를 그린다면 바퀴를 감싸는 컨베이어 벨트(?) 같은 것이나 그 안의 보이지 않는 나사 같은 부속품을 모두 그리고, 집을 그린다고 하면 벽돌이나 그 안의 배선이 지나가는 것을 모두 그리고, 닭을 그린다면 닭의 깃털, 물고기를 그린다면 물고기의 비늘을 모두 그리는 식이다. 서준이의 이러한 내장기법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이다'


'라파엘처럼 그리기 위해서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서는 평생을 바쳤다'


피카소가 남긴 말처럼 서준이를 비롯한 어린아이의 그림에는 이처럼 특별한 것이 있다. 그리고 이런 '리틀 피카소들'이 그려내는 작품들은 어떤 것이든(그것이 불상일지라도) 귀엽게 보이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대회 이야기로 돌아가,


'선착순'이라는 말은 언제나 조급증을 불러일으킨다. 쓸데없이 달리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서둘러 접수 첫날 오전 내에 참가신청을 했다. 몇 시간 만에 벌써 정원의 절반 가까운 45번째로 접수가 된 것을 보니 금새 마감이 될 것 같다.


나는 서준이가 그 많은 문화재 중에서 무엇을 그릴지 궁금했다. 그러나 대회를 준비한다고 해서 소란을 떠는 것보다는 평소와 같이 그림 그리는 루틴을 유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잘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 부담감은 걸림돌이 되어 평온을 해치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 잘못되었을 때 후유증이 상당하다.  


대회가 가까워 오자 서준이가 그리고 있는 문화재를 공개했다.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돌돌 말려있는 도화지를 펼쳤다. 그 안에는 거대한 불상이 피곤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아마도 인자한 표정을 표현하고 싶었을 듯싶은데 아무래도 불상의 표정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 하나 잘못 그었다가는 자칫 무섭게 보일 수도, 로봇 같아 보일 수도 있다. 부처가 로봇이 되지 않도록 차라리 피곤한 표정이 100번 낫다. 부처 뒤로는 연꽃과 황금색 광채가 표현되었다.


“와, 서준아 멋진데!”


나는 아무래도 부처의 표정이 애매했지만 우선 칭찬을 했다. 저녁에 제이에게도 이 부처상을 보여줄 것이 기대가 되었다. 제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런 그에게 하루종일 부처를 그리고 있는 아들이라..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


저녁이 되어 제이가 집에 왔다.


“여보, 서준이가 그리고 있는 그림 보여줄까?”


“오, 좋지.”


나는 돌돌 말아진 도화지를 펼쳐 보여주었다.  피곤한 부처가 다시 나타났다. 제이는 눈이 한번 커지더니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서준아, 다른 문화재는 없었니? 청동검이나 이런 것도 있잖아. 왜 하필 불상이야?”


“여보, 대회인데 토기나 항아리 같은 거 그리면 임팩트가 있겠어? 이 불상 좀 봐. 얼마나 멋있어? 도화지가 아주 가득 차잖아. 이 정도 웅장함이 있어야 어필이 좀 돼지. 그리고 불상도 문화재로 순수하게 바라봐봐. 예수님도 이해하실 거야”


나는 제이의 반응이 재미있어 신나게 서준이를 대변했다.


“맞아,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그렸는데~.”


“그래. 잘했다.”


제이는 마지못해 잘했다고 얘기했다.     


대회 하루 전날, 우리는 박물관을 찾았다. 서준이가 그리고 있는 불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구석기의 여러 가지 돌덩이들과 농기구, 무기, 왕관 등을 지나 서준이가 그리고 있는 불상과 비슷한 불상을 찾아냈다.


“서준아, 대회가 시작하자마자 딴 데 갈 것도 없이 바로 이 자리로 직행하는 거야. 알겠지? 우왕좌왕할 필요가 없어. 그냥 여기로 와서 딱 자리를 잡아.”


치밀한 나는 다시 출입구로 돌아가 동선을 다시 한번 연습시켰다. 마치 암살자가 완벽한 위치에 총을 숨겨놓고 정확한 시간에 그 자리로 가서 거사를 실행하듯 비장하게.      


대회 날.

대회는 오후 1시 40분에서 5시까지 진행된다. 나는 서준이와 일찌감치 와서 박물관 앞에서 대기했다. 시간이 되자 학년별로 줄을 섰다.


“박물관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 원하는 문화재 앞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학부모님들은 박물관 옆 건물에서 기다리실 수 있습니다.”


곧이어 아이들이 들어갔다. 나는 서준이와 비장한 눈빛 교환을 했다.


‘서준아, 곧장 부처에게로 가.’


‘알겠어 엄마! 잘 그리고 올게.’     


서준이는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아이다. 수학문제도 “엄마 나 다 맞은 거 같아.”하면 3분의 2는 틀려 있다. 그래도 항상 다 잘한 거 같다고 대답한다. 이번에도 가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3 등 안에 들 거 같은데. 아니 일등 하면 어떻게 하지?”


“너무 좋지. 내가 봤을 땐 일등이야. 너보다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


둘이 장단이 잘 맞는다.      


나는 차에서 대기했다. 차에서 책을 읽다가 미드도 잠시 보다가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2시 30분이 되었는데 벌써 방송이 나온다.


“2학년 ***학생 나왔습니다. 부모님은 입구로 와주세요.”


저학년들은 벌써 나오는구나,

이 아이는 상 타긴 글렀군,


3시 안에 저학년 생들은 우르르 나왔다. 고학년들은 디테일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중인가 보다. 서준이는 4시쯤 나왔다.


“서준아, 잘했어?”


“응.”


서준이는 역시 잘했다고 대답했다.


“엄마, 몇 명은 그릴 문화재를 고르느라 돌아다니더라. 나는 곧장 부처에게로 갔어.”


“너무 잘했다.”     


며칠 후,

박물관에서 연락이 왔다. ‘꿈나무 상’. 안타깝게 3등 안에는 들지 못했지만 수상을 하여 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다. 상장과 부상으로 받은 문화상품권은 학교로 전달되어 학교에서 시상하게 되었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들이 커서도 예술가로 남을 수 있게 하느냐이다.'

/피카소.


오래도록 예술가의 눈으로,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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