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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디김 Sep 04. 2023

비 내리는 새벽, 제이의 기사가 되어

#08. G90을 타는 운전기사

월요일까지 대체 휴일로 이어지는 황금연휴이다. 여느 가정의 달력이라면 몇 달 전부터 미리 현란하게 체크가 되어 여행이나 특별한 일정이 표시되어 있겠지만 그녀의 달력은 보통의 날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체크가 없다. 골프러버인 영감의 경우 골프로 황금연휴를 가득 채웠다. 심지어 월요일에 비가 예보되어 있음에도.


영감은 골프장 측으로부터 악천후로 인한 불가피한 취소 공지를 받기 전에는 먼저 예약을 취소하는 법이 없다. 골프장에서 먼저 취소를 하게 되면 환불을 받게 되지만 스스로 예약을 취소하게 되면 그대로 돈을 날리기 때문이다. 골프장 측에서도 손실이 대단하기에 벼락이 치지 않는 이상, 골프는 계속된다. 부슬부슬한 비 정도는 골프를 가로막을 만한 장애의 축에도 속하지 못한다. 실제 제이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영감과 그의 일행이 비 맞은 생쥐 꼴로 골프를 친 것도 많이 목격했다. 나이도 있는 편인데 비를 뚫고 5시간이나 골프를 치는 것을 보고 제이는 영감이 진로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일찌감치 필드로 나가 골프 꿈나무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며칠 전부터 캠핑을 가자고 성화인 아이들에게 주말이 되면 가자고 하였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못 가게 되어 제이의 마음이 무겁다. 지난번에는 차를 두고 퇴근하라 하였기에 출근할  차편이 없는 제이를 태워다 주기 위해 그녀까지 일찍 일어났다. 새벽 3시 30분에 맞춰진 알람으로 아이들까지 모두 기상하게 되었다. 제이는 일찍 일어난다고 거실에서 잤는데 신속하게 끄지 못한 탓에 모두의 기상나팔이 된 것이다. 그녀는 아직 한참은 더 자야 할 아이들을 달래서 안방에서 같이 자게 한 후에 제이와 함께 문을 나섰다.


새벽이 한창인 밖은 비가 오고 있어 어둠이 축축이 젖어있다. 축축한 어둠을 뚫고 그녀는 운전대를 잡는다. 잠이 든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깨어버린 그들의 뇌는 아직 일어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적어도 언어의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은 아직 잠들어 있는 모양이다. 말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들의 공간은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와 규칙적인 와이퍼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제이를 담당의 아파트 앞에 내려주고 그녀는 익숙하게 차를 돌려 집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내비를 찍고 오던 길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녀는 라섹 수술의 이력으로 어둠 속에서의 운전이 취약하다. 어둠을 밝히는 가로수 불빛은 야간에 여기저기 퍼져 보이는 빛 번짐 효과가 되어 차선의 구분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그녀가 어둠 속 운전이나, 비 오는 날 운전을 꺼려하는 이유이다. 역시나 비가 오고 날은 어둑하고 차 안은 습기까지 차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속도를 줄이고 급하게 에어컨을 가장 세게 가동해 본다. 이렇게 비가 오전 내내 잡혀있는데 골프라니, 연휴에 아이들까지 새벽부터 잠을 설치고 어둠과 빗속을 뚫고, 빛 번짐의 복병을 한번 더 피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고정으로 맞춰둔 클래식 채널에서는 베토벤의 소나타 14번 Op.27-2(월광)이 울려 퍼진다. 어둠이 집어삼킨 새벽, 줄기차게 내리는 비와 어울려 곡에 더 깊이 빠져든다. 이 길 끝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 그녀는 그곳에 이미 들어와 버린 것은 아닐까.


며칠 전 새벽, 제이가 출근 준비를 하며 욕실에 들어간 사이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그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새벽 5시쯤인데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한 거지?, 상식적이지 않은 울림에 궁금증이 일어난 그녀는 엎어져 있는 스마트폰을 뒤집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익숙한 이름이다. 순간 심장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사업이 실패하고 쫓기듯 5층 꼭대기 빌라로 이사 간 그곳까지 찾아온 그 이름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탓에 핏덩이 아이들을 안고 당황한 그때의 어린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더위가 한창인 그곳, 작동이 원활하지 않은 구식 벽걸이 에어컨 한 대에 의지해 여름을 버텼던 그곳이다. 얼음이 부족해 미지근한  믹스커피를 만들고 있는 떨리는 손, 불편한 그들의 얼굴. 어색한 분위기.. 더워서 흘린 땀인지 긴장해서 흘린 땀인지 그녀의 이마에 송골 땀이 맺혀있다.


그 이름을 발견하고 다시 스마트폰을 원래대로 덮어두었다. 출근에 바쁜 제이는 그대로 급하게 밖을 나갔다. 그녀는 문이 닫히고 그대로 서 있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눈물은 막을 도리가 없다. 소요되는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정신을 차리게 위해 눈을 크게 깜박이며 눈물의 흐름을 차단해 본다. 침을 한번 크게 삼키고 숨을 일정하게 들이키고 내쉰다.

제이는 아직도 그곳에 멈춰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티를 내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며. 무엇으로 감출 수 없이 정면으로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무너져 버릴 것 같았던 그때의 그곳에서. 어쩌면 그 많은 시간, 제이는 매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바쁘게 움직였을 수도.   


월광 소나타가 끝날 즈음, 그녀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시동을 끄고 더 이상 음악이 들리지 않자 그녀는 과거와 현실의 복잡한 생각의 교차, 요동치는 감정의 블랙홀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뇌의 '리셋단추'를 눌렀다. 많은 시간 연습한 덕에 이제 리셋의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는 장거리 마라톤을 달리고 있다. 지루할 만큼 땅에 발을 내디뎌야 하는 그 긴 길 위에 서 있다. 초반에는 발을 내딛기도 힘든 뾰족한 돌이 가득하여 발에 피가 나기도 하고 돌에 걸려 넘어져 있기도 하였다. 그래도 천천히 일어나 계속 걸었다. 달릴 힘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그저 느릿느릿 걷기만 할 뿐이었다. 그럴 때에는 골인 지점 이라든지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런 종류의 것들은 생각할 여력이 없다. 그저 이 험악한 길을 벗어나기만을, 조금이라도 걸을 만한 길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라도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더니 조금씩 다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계속 걸은 다리는 근육이 생겼는지 조금씩 달릴 힘도 생겼다. 달릴 수 있게 되니 목표지점이라는 것에 도착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달리는 속도를 조절한다. 가끔 빨리 가고 싶어 속도를 가속해 보기도 했지만 그러다 보면 오히려 힘이 빠져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는 부작용도 경험했다. 체력을 적절히 안배하기 위해 달리는 리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나는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려 노력한다. 삶의 무거움이 다시 어깨를 주저앉히려 할 때 이 리셋 버튼을 누르며 다시 길 위에 선다. 그리고 생각한다. 거친 돌길 위를 걸을 때보다 서러움의 농도는 엷어졌으므로, 그때처럼 비참함을 빈번히 느끼지 않으므로, 미세하지만 조금씩 다른 풍경의 곳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어떤 일이든 갑자기 좋아지는 일은 적으므로, 삶은 영화가 아니므로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야 한다고.


비는 어느새 그치고 어둠을 몰아내며 해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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