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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디김 Sep 16. 2023

수혈을 받다

#10. G90을 타는 운전기사

“수혈을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몸속 혈액이 일반 사람의 3분의 1밖에 없군요. 정상생활이 안 되셨을 텐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신 거죠?”

헤모글로빈 수치를 검사한 의사의 말이다.


제이는 3~4주 전부터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들어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고.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체력저하로 여기며 약해진 제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몸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그가 미련해 보이기도 했다. 나 역시 약 한 달째 지독한 감기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둘은 밥을 먹거나 소파에 앉아 얼굴을 마주할 때면 돌림노래 하듯 여기저기 아픈 증상을 얘기했다.


"숨이 잘 안 쉬어지네. 몇 걸음 내딛기도 힘들어."

하고 제이가 말하면,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려서 먹을 수가 없어."

내가 답했다.


제이는 병원을 잘 가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동안 정말로 병원에 갈 시간이 없었다. 모처럼 쉬는 토요일 오전에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수액을 맞으러 병원으로 향했다.


오픈시간에 맞춰 갔는데도 1시간 30분가량을 기다려 진료를 볼 수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여기저기 코로나 환자들도 보이고 저마다 콜록이며, 동공이 살짝 풀린 것이 대기환자들은 한눈에 보아도 기진맥진해 보였다. 기다리는 내내 여기서 더 병을 얻어가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며 마스크를 코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순서가 되어 의사에게 증상을 말하니 나는 바로 수액 조치가 취해졌고, 뒤이어 제이가 들어왔다. 그는 나보다 의사와 많은 시간을 가졌고 둘이 뭔가 심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제이는 수액과 더불어 피검사를 위해 피를 뽑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방에 나란히 누워 수액을 맞았다. 같이 수액을 맞는다니 수액 실이 참으로 아늑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이는 역시 머리를 대니 바로 잠이 들었다. 방금 기상했는데 또 잠이 들다니, 역시 부럽고도 대단한 수면력이다. 곧이어 코를 골기 시작한 그 덕분에 나는 얕은 잠조차 잘 수 없었고 대신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둘이 수액을 맞는 노후된 몸을 가지게 되었구나. 이제 갖가지 병들이 찾아오겠지. 나이 들어 병든 모습과 관 속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상상한다. 두 손 꼭 잡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수액의 효과로 나는 한결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고 머리 아픔 증상과 울렁거림도 점차 나아갔다. 제이는 주말을 지나 피검사 결과가 나오면 다시 병원에 와서 결과를 듣기로 했다.

 

그전에 나는 제이의 증상을 미루어 보아 피에 관하여 어느 정도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들이

"엄마, 피가 부족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하며 읽고 있던 '드라큘라도 궁금해! 피와 혈액형'이라는 책을 펼치며 이야기했다.

"얼굴이 새하얘지고 힘이 없겠지? 혈액이 하는 일이 뭔데?" 아들이 잘 읽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한 질문을 했다. 아들은 의사에 빙의되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혈액 안에 적혈구는 폐에 들어온 산소를 온몸에 배달을 해줘. 그래서 피가 부족하면 숨을 잘 쉴 수 없고 얼굴이 하얘진대.”

듣고 있자니 제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책을 펼쳐 아들과 같이 나머지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적혈구의 30퍼센트는 헤모글로빈. 헤모글로빈은 철분이 들어있는 단백질로 적혈구가 온몸을 돌면서 산소를 배달하는 것은 바로 헤모글로빈 덕분이다.



책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남편이 3주 전에 화장실에 한참을 오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기다림의 기다림은 제이의 고질병인 치질을 악화시킨 것일까. 치질과 함께 해온 많은 세월 동안 이리 크게 피를 흘려 본 적은 처음이다. 변기가 온통 붉은빛이다. 화장실에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던 제이가 나왔다. 얼굴이 새하얘진 것이 이상했지만 원체 화장실을 동굴 삼아 오래 있는 사람인지라 이상하게 여지 않았다. 그다음 날부터 제이는 새하얀 얼굴을 하고 몇 발자국도 걷기 힘들어했다. 시작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주말이 지나 화요일이 되었다. 역시 헤모글로빈 수치가 현저히 적어져 일어난 일로 제이는 수혈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교통사고나 끔찍한 사고를 당하지 않고도 치질로도 피가 부족할 수 있구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뇌가 깜짝 놀라는 것을 느끼며 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나는 아마 자리 깔고 누워 있었을 것이다. 제이는 어떻게 그 힘든 시간들을 버텼을까. 병원에 가서 재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타박도 나왔지만, 그 인내심이라고 해야 할까,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티를 내지 않고 그저 일만 했던 근면한 소 같은 모습이 떠올랐다.(근면한 소보다는 근면한 좀비가 적당 하겠다) 그 상태로 새벽 출근을 하고 종일 건축 일을 했고, 심지어 퇴근 후에 N잡의 다른 일까지. 피가 부족한 몇 주 동안에도 새하얀 얼굴을 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뚜벅뚜벅,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일만 하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견디는 것도 습관이 되는 것일까? 담담하게 정신적 고통이나 몸의 아픔을 참아내는 그는 어떨 때 보면 어떠한 도를 닦는 수행자의 모습 같기도 하다.

아직도 사업실패의 그늘로 많은 빚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그는 하루하루, 순간순간 자신의 어깨의 짐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혹자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으니 편하게 생각하라고 하지만 짐을 직접 맨 사람은 짐의 무게만큼 그 고통을 오롯이 느낀다. 짐이 조금씩 덜어지지 않는 이상. 그렇기에 나는 그의 어깨의 짐을 나눠서 메고 그와 보폭을 맞춰 같이 걸어간다. 너무 서둘러 가다 지치지 않도록,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페이스를 맞춘다. 아직 어린 두 아이가 길을 잃지 않도록 어린 손도 꼭 잡고 간다.


다시 피 얘기로 돌아오자. 명랑만화의 주인공처럼 긍정적인 제이는 운전기사의 세계에서도 곧 자리를 잡았고 인간성의 승리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팍팍한 아저씨들의 세상에서 바지런하고 싹싹한 제이는 영감뿐만 아니라 동료들과도 꽤나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기사들 톡 방에 헌혈증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전하자 서로 주겠다며 순식간에 모인 헌혈증이 30장이나 되었다. 두툼한 헌혈증을 가지고 제이는 수혈을 받았다.          


수혈을 받아 정상으로 돌아온 제이는 이제 다시 예전의 생기를 되찾았다. 앞으로 더 추진해 갈 동력을 얻은 듯하다. 그동안 꼬였던 일들도 다시 풀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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