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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디김 Sep 06. 2023

100통의 전화로 받아 낸 미수금

#09. G90을 타는 운전기사

약속된 결제일에도 역시나 입금 벨이 울리지 않았다. 1,500 만원 가량의 미수금을 받는 날이 며칠이 지났다. 이동식 주택을 만드는 이 업체는 우리의 외장재를 붙여 작은 집들을 판매한다. 요즘 이동식 주택, 농가주택의 인기가 많아 얼마 전 더 큰 땅으로 옮겨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업체이다. 업체의 사장은 익월 10일마다 결제를 해준다는 약속을 지키는 법이 없다.


제이는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이 많은 횟수의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는 중이다. 어제부터 전화를 했지만 상대는 묵묵부답이다. 이쯤 되면 거의 지독한 사랑의 스토커쯤 되는 분위기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연락을 받던 B업체 사장은 돈을 줄 날 결제를 하지 않을 계획이면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마도 버릇처럼 줘야 할 돈은 제때에 주지 않고 상대방 애간장을 태울 데로 태우는 그런 사람이리라.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제이는 집요한 사람이다.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상담원과의 전화로 반나절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이에 질린 상담원은 제이의 요구가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따질 수 없이 종국에는 ‘그래서 어떻게 해달라고’, 로 끝이 난다. 상담원이 전화를 제발 끊고 싶은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이 제이의 수법인 것 같다. 제이는 정당한 요구라 했지만 옆에서 지켜봤을 땐, 글쎄.. 서둘러 퇴근 후 깡소주를 들이키며 그의 욕을 하고 있을 상담원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제이가 끊임없이 통화버튼을 누르고 있을 당시 거실에는 영화 ‘존윅’이 틀어져 있었다. 하지만 제이는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은 잠시 티브이 화면에 머물렀다가 다시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존윅이 자신의 개를 죽인 놈을 집요하게 좇는 것처럼 한쪽 손으로는 통화버튼을 끈질기게 누르고 있었다. 그는 키아누 리브스처럼 스펙터클한 액션은 동반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귀찮아 미칠 지경까지 이르러 결국 돈을 주는 게 낫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할 만큼의 집요함은 가진 사람이다.



스마트폰을 사이에 두고 전화를 거는 자와 피하는 자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마침내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함께 심란해하고 있는 나도 깜짝 놀라 스마트폰을 잡고 있는 제이의 손에 시선을 집중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뭔가 힘겨워 보이면서 동시에 짜증이 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 순간 전화가 너무 많이 오면 수신 측에서도 배터리에 영향을 받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는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닳기 직전이라 전화를 받은 것일까? 아니면 계속 울려대는 전화 때문에 자신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로 귀찮기에 전화를 받기로 결정한 것일까?


제이는 어제와 오늘, 100통 가까이 집요한 전화를 건 스토커답지 않게 화를 내기는커녕 나긋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얘기를 이어나갔다. 스마트폰 너머 구애의 대상이 화를 내어 달아나지 않도록.

'이렇게 전화를 해대는 사람과는 다시는 거래를 하고 싶지 않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잠도 중간중간 자야 하는데 전화가 와서 한숨도 못 잤다', 이런 종류의 소리가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제이의 손에서 스피커처럼 흘러나왔다. 듣고 있자니 싸대기를 올려붙이고 잠들어 있던 풍성한 쌍욕의 언어들이 깨어 나오려 한다. '적반하장'이란 이런 대목에서 쓰는 것이겠지. 덧붙여하는 말이 시트콤이다. 전에 자신에게 영업을 한 사람도 입금을 해줬더니 그다음부터는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고, 사업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정리하자면 필요한 물건은 먼저 받고 자신이 줄 돈은 최대한 늦게 주고, 여차하면 안 줄 빌미를 찾는 그대는 정당하고 물건을 팔고 약속된 날짜에 돈을 받지 못해 줄줄이 거래처에 독촉을 받고 있는 우리는 잘못이다...?


노심초사로 질려버린 그 어느 영업사원의 얼굴이 떠오른다. 당신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 하나 추가요, 우리도 이제 당신 전화는 수신 거부다, 사업을 한다는 사람이 기본인 ‘신뢰’라는 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사업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유튜브까지 만들어 자신의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돈 관계는 지저분하다. 돈을 적게 벌 지언정 당신과는 다시는 거래를 하지 않겠노라, 제이와 나는 다짐했다.

제이는 화가 나 토라져버린  어린아이 달래듯 그를 어르고 달랬고, 드디어 내 스마트폰에 입금 알람이 울렸다. 그리고 우리는 체증이 모두 내려간 듯 한차례 환호성을 지른 후, 내, 외적 댄스 타임을 가지고 나머지 ‘존윅’을 편안하게 시청했다. 복수를 위한 거침없는 존윅의 액션씬이 이리 시원할 수 없다.


오늘도 돈을 받지 못하면 그대로 차를 타고 2시간을 달려 찾아가려고 했다. 우리가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약속한 대로 매입처에 돈을 치러야 했는데 약속한 날짜가 계속 미뤄져 우리도 그 ‘신뢰’라는 것을 잃기 직전이라 부모님까지 동원하여 그 돈을 메꾸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날들이었다. 애원을 하자 바로 입금을 한 것을 보니 우리처럼 돈이 진짜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으면서도 주지 않는 것인데 무슨 심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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