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 가깝다.
몸이 무거운 것도 아니고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마음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 날.
해야 할 일들은 분명히 있는데 그 목록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해야 할 건 해야지, 라고.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세상은 멈춰주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떤 날의 나는
그 말 앞에서 더 작아진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지쳐 있는 사람인데
그 차이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종종 나를 겁쟁이처럼 보이게 만든다.
도망치고 있는 것 같고 뒤처지고 있는 것 같고
모든 걸 놓아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나를 다그친다.
왜 이 정도도 못 하냐고, 왜 이렇게 약해졌냐고.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는
그 다그침조차 너무 벅차다.
나는 어느 순간 깨닫는다. 오늘의 나에게 필요한 건
또 하나의 각오가 아니라 멈출 수 있는 허락이라는 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일 수 있다는 것.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나를 망치는 게 아니라
나를 붙들어 주는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날 하루를 줄인다.
해야 할 일을 모두 지우고 가장 작은 것 하나만 남긴다.
씻기.밥 먹기. 잠들기. 그 세 가지만 해내면
오늘은 충분하다고 정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일의 나에게 넘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나는 아주 조금 회복된다.
눈을 감고 숨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느끼고
생각이 천천히 가라앉는 걸 기다린다.
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정체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제 다르게 부르기로 했다.
정지 버튼이 아니라 재정비 버튼이라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의 용기는 억지로 움직이는 데 있지 않다.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오늘의 나는 많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살아낸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