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바라기 Aug 31. 2024

야나할머니네 강네이 이야기 2

어둠 속의 강네이 노인들

"누 내좀 저짝 방에 델꾸다 다오"


"하라부지 내가 델따 줄게"


방문벽을 붙잡고 문지방을 넘으시는 할아버지 발에 하얀 고무신을 걸쳐 드리면 할아버지는 이상한 몸짓으로 고무신에 발을 구겨 넣으시고 당신의 뽀얗고 커다란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잡으셨다. 그렇게 2인3각 경기를 하 듯 마당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면 훗날 누에를 치던 사랑방이 나오는데 할아버지는 요즘 매일 아침 그 방으로 출근을 하신다.


"시정아 니 하래비 방에 델따 놓고 저 안말 유씨네 가서 우리 집에 막걸리 드시러 오시래요 하고 오래이"


할머니의 지령에 나는 쏜살  같이 안말 유 씨 아저씨네로 가서 할머니의 말을 고대로 전하곤 절대 아저씨와 함께 오지 않고 갈 때 보다 더 빠른 달리기로 집에 도착해 있으면, 한 참이 지나 유 씨 아저씨의  딱딱딱 지팡이 소리가 대문간을 넘어오는 것이 들렸다.


"성님 어너 방에 계시요?"


"나 이 짝 사랑방에 있네"


유 씨 아저씨는 내가 어깨를 내어 드리지 않아도 기가 막히게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방향을 잡으셨고, 할아버지는 친절하게 담뱃대로 재떨이를 땡땡 치며 아저씨에게 당신이 계신 곳을 알리셨다. 그러면 뜨럭 앞까지 다다라 익숙한 솜씨로 벽에다 지팡이를 세우고, 양손을 더듬거려 신발을 벗으시곤 문지방을 만져 방에 들어가 주섬주섬 자리를 틀으셨다.


"형수님요 전노리를 줘야 목을 축이고 일을 하지"


유 씨 아저씨가 웃으며 할머니에게 크게 소리칠 때면 유 씨 아저씨의 눈은 흰자위만 보였다.


"정구지 느코 장떡 좀 부쳤스이 마이 묵고 노래 마이하다 가요"


할아버지와 유 씨 아저씨는 할머니가 손에다 쥐어준 막걸리 사발과 장떡을 양손에 들고 웃으셨고, 엄마소가 쭈욱 쭈욱 소리를 내어 물을 마시는 것처럼 같은 소리를 내며 막걸리 사발을 단숨에 비우셨다. 그리고 드디어 펼쳐진 두 분의 세계. 두 분은 오늘 해가 질 때까지 종일 저 방에서 마른 옥수알 따는 일을, 할머니는 마당 구석에서 담을 향해 기계 같은 채질로 옥수수 쭉정이와 먼지를 날려버리는 일을, 나는 하얗게 쌓여가는 옥수수 알들을 바가지에 담아 깨끗한 새 포대에 담았다. 




할아버지와 유 씨 아저씨는 어둠 속의 남자였다.

할아버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늦게 실명이 되셨지만 유 씨 아저씨는 약한 시력으로 태어나 아가 때 이미 시력을 잃으셨다고 들었다. 성님 동상 하며 지내시던 두 분은 어둠 속의 남자들이 되면서 더 돈독해지셨고, 유 씨 아저씨가 하루종일 우리 집에 와서 거드는 옥수수알 따는 일은 아저씨의 하루 식사를 해결하는 일과 함께 일당도 버시는 일도 되어 종종 셨고, 무엇보다 산에 가시는 할머니와 들에 가시는 부모님, 학교에 가는 우리들로 비어진 집을 두 분이서 지키셨다. 그리고 새참을 드시고 나면 쉬는 시간처럼 꼭 노래를 부르셨는데 내가 듣기엔 음정 박자 가사 다 이상한, 정말 이상한 노래였다. 하지만 마루에 엎드려 숙제를 하며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유 씨 아저씨의 떨리는 목소리는 언제나 슬프게 들렸다. 지금 생각하면 노래를 마친 아저씨를 향해 손뼉이라도 크게 쳐 드릴걸 하는 늦은 후회도 남아 있지만 아쉽게도 나에겐 그런 넉살이 없었다. 그리고 특히나 강하게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아저씨가 웃으실 때 눈이 매번 하늘로 향하는 것 같았는데 우리 할아버지 눈과는 다르게 눈동자는 보이지 않고 흰자위만 보여서 나는 아저씨가 불쌍하다가도 무섭기도 했다.


"시정아 거 있나?"


"예 마루에 있어요"


"니 가서 주전자에 시원한 물 좀 받아 온네이"


할아버지가 건네신 노란 주전자는 전에 막걸리를 받아 오던 주전자였는데 정말 탈탈 비어 있었다. 나는 뜨뜻한 수돗물이 나오는 것을 한참 기다렸다가 시원한 물이 나오자 주전자에 한가득 담아 다시 가져다 드렸고, 할아버지와 아저씨는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돌아가며 목을 축이셨는데 나는 그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었다.


"성님 안 개루워요? 거 강네이 문지가 대단네"


"안 개룹긴. 거 벽에 만져 보믄 애비가 걸어둔 싸리가재이 맨지킬텐데"


유 씨 아저씨는 벽을 더듬거리다 벽에 걸린, 끝에 마른 강네이통이 꽂힌 싸리가지를 으셨고 벅벅 소리가 나도록 한참을 긁으셨다.


유 씨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효자손.

그 효자손은 아빠가 만들어 두신 작품이었다. 처음부터 누구의 특허물이었는지 알 순 없지만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가 막힌 효자손이 아닐 수 없다. 사용 횟수가 늘어나 촉감이 무뎌지면 언제든 손쉽게 새로운 강네이통으로 교체할 수 있다는 최고의 장점도 있었다.

있는 힘껏 늘어나 메리야스의 형체를 잃어버린 누런 할아버지의 난넹구 사이로 흘러내리던 쭈글쭈글한 뱃가죽, 척추뼈가 이상하게 휘어지고 튀어나와 있어 마치 외계 괴물이 나오는 영화 속 악당 같았던 할아버지의 등을 긁어주던 강네이통 효자손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댕, 댕, 댕, 댕, 댕, 댕, 댕


"시정아 일곱 시나?"


"네 일곱 시"


"자네 이제 고만 손 떼게. 지녁 무야지"


할아버지가 유 씨 아저씨에게 일을 그만하자고 말씀하신다.


"정지에 지녁 안즉 멀었나?"


"다 됐다고 마당으로 나오시래요"


나는 아침처럼 할아버지에게 고무신을 내어 드리고 마당에 있는 들마루로 할아버지를 안내했고, 유 씨 아저씨는 당신이 아침에 세워두신 지팡이를 정확히 짚어 할아버지가 계신 들마루까지 찾아오셨다. 물론 할아버지가 숟가락으로 밥상을 탁 탁 치시며 유 씨 아저씨를 소리로 인도하셨고, 나는 혹시나 유 씨 아저씨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실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지만 역시나 아저씨는 단숨에 들마루까지 가셨다.


노래도 하며 얘기도 하며 등도 긁으며 하루를 보내신 두 분은 산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엄청 큰 멸치와 감자, 호박, 김장김치를 넣고 끓이다 무심하게 뚝뚝 떼 넣은 밀가루 반죽 첨이 들어간 수제비 한 그릇에 막걸리를 한 사발씩 드시고 헤어지셨다. 할아버지는 다시 할아버지 방으로, 유 씨 아저씨는 딱 딱 딱 소리를 내는 지팡이를 짚고 다시 캄캄한 산골짝 비포장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아저씨의 뒷모습과 지팡이 소리가 왜 지금까지도 이렇게 맘에 박혀 있는지 괜스레 눈물이 고인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동네 마트 마당엔 매미가 울기도 전부터 커다란 천막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천막 아래로 파란 옥수수 껍질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고, 커다란 LPG 가스통을 여러 대 동원한 양은 냄비가 걸려 뜨거운 김을 뿜어댔는데, 그 덕분인지 기가믹히게 그 무렵부터 매미가 정신이 번쩍 들도록 울기 시작했다. 매미와 옥수수는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엉뚱한 상상을 하며 마트에 갔던 어느 날엔 커다란 압력밥솥에 달려 있는 추가 유혹하듯 뱅글뱅글 춤을 추더니 알아서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구수한 옥수수 익은 냄새로 나를 설레게 하는 바람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버릴 듯 한 깜장 봉다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하모니카를 불었다.


할아버지와 유 씨 아저씨의 손에서 탄생하던 뽀얗던 옥수수알들.

할머니가 좋아하셨고 지금도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옥수수. 엄마소가 먹고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고, 우리도 먹고 자랐던 그 옥수수. "기차놀이 해 주마" 가지런한 옥수수 알을 길게 길게 떼어 주시면 개수가 늘 때마다 환호하던 우리들의 어린 날.

그런데 입추가 지나고 말복이 지난 지금 점점 옥수수는 시들어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매미가 울고 있으니 옥수수를 한 번 더 먹는 호사를 누려봐야겠? 내일 퇴근길에 마트 마당엘 갈 생각에 흐흐흐 설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