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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May 19. 2022

야나할머니와 메밀적 꿀 무렵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흙집이었던 우리 집의 뒤꼍엔 산을 일군 밭이 있었다. 그 밭 가에는 해마다 파란 부추들이 올라왔고 그 구석에 심은 호박 덩굴은 산으로 산으로 올라갔으며, 호박을 따러 가는 길 가끔 소리 없이 움직이는 굵다란 뱀도 만나는 그런 밭이었는데 할머니는 해마다 메밀 씨앗을 뿌리셨다.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메밀의 습성을 아셨기 때문에 흙이 좋은 밭엔 감히 엄두도 못 내시고 뒤꼍의 구석진 땅에나 심으셨던 것 같다.    


삼각형도 아닌 것이 물방울 모형도 아닌 것이 애매하게 생긴 메밀 씨앗은 마당을 돌아다니던 닭도 거들떠보지 않던 매력 빵점의 곡식이었는데 할머니는 유독 그 메밀을 좋아하셨다. 언젠가 도깨비라는 드라마에서 메밀꽃이 나오면서 호기심을 자극했었는데 우리가 아는 메밀꽃은 안개꽃을 닮은 하얀 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엄청 힘겹게 다닥다닥 핀 꽃에다 수줍은 붉은빛도 머금고 있다. 물론 이 꽃도 꽃치곤 그다지 근사하지 않아 우리 집 화병엔 한 번도 꽂아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커다란 목단꽃이나 작약꽃이 자주 꽂혔던 것 같다.    


메밀밭은 벌들에게 천국이었다. 메밀꽃이 하얗게 피기 시작하면 벌들이 윙윙거리며 열심히 일하는 소리는 안마당에서까지도 들릴 정도였는데 언젠가 학교에서 벌에 잘못 쏘이면 숨을 못 쉬어서 죽을 수도, 동네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친구 말을 들은 뒤 벌이 무서워졌던 나는 메밀밭 근처에 있는 호박 덩굴에서 호박을 따오라는 심부름을 할 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벌들도 떠나간 그 메밀을 베는 날. 토요일이라 학교에서 일찍 온 나를 할머니는 점심을 드시자마자 부르셨고 나에게 배당된 일은 할머니가 베어 놓으신 메밀을 조심조심 갑바천 위로 옮겨다 드리는 일이었다.


"야야 언나 나르듯 살살 해라 들구뛰구하믄 메밀 다 으러진다"


할머니는 늘 천방지축 날뛰는 내가 못 미더우셨는지 시작 전부터 당부와 잔소리를 하셨다. 오늘도 할머니는 진통제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으셨다. 하루에 밥 먹는 횟수보다 더 많이 드시는 것 같은 저 진통제는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습관적으로 드시는 것인지? 무릎 관절이 그리 아프시면 산에 가시지 말라 아빠가 그리 잔소리해도 할머니는 절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밭 구석에 갑바천을 깔고 할머니가 베어 놓으신 메밀 싹들을 아기 옮기듯 조심조심 옮겨다 드렸다. 다 베어진 메밀 싹을 할머니는 전용 방망이를 들고 빨래 방망이질하듯이 타작을 시작하셨고, 모여진 더미에서 바가지로 푹하고 퍼 키에다 얹으시곤 불순물들을 까부르기 시작하셨다.

할머니가 키를 한 번 두 번 위아래로 흔들 때마다 쭉정이와 티끌들이 밀려 나갔고, 그 수 없는 흔들림의 결과에 거무스름한 씨앗들이 모습들을 드러냈다.


"애걔 이것밖에 없는 거야"


할머니 뒤로 수북이 쌓여 있는 메밀 싹 덤불과 씨앗의 양을 번갈아 쳐다보며 나는 올해 할머니의 농사는 망한 거 같다고 생각했다.

할머닌 몇 바가지 되지 않는 메밀 씨앗을 대야에 담으시고, 물에 둥둥 뜨는 씨앗들을 조리로 건지셔서 바가지에 담아주시더니     


"야야 이거 달구새끼들 주고 온나"


"할머이 갸들 이거 맛없어서 안 먹는다."


"그래도 갖다 주고 온나. 지들이 배고프믄 무야지 안 먹고 비기나"


나는 닭장까지 가야 하는 귀찮음에 닭을 대변하였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닭장에 다녀왔다.     


신기하게도 할머니가 휘휘 팔을 저어 조리질할 때마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꼭꼭 숨어 있던 작은 돌들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을 그렇게 집중하셔서 돌과 싸움을 하셨고, 소쿠리에 건져져 윤기 나는 씨앗들을 고운 채반에 펼쳐 놓으시곤 물기가 마르게 손바닥으로 비벼주셨다. 나도 할머니가 하시는 대로 따라 했고 처음엔 씨앗들이 무서운 괴물처럼 손에 들러붙어 징그러웠지만 금세 체온과 바람에 말라 호도독 채반 위로 떨어지는 모습과 손에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할머니가 그만하라 주문하셔도 한참 동안 씨앗을 손으로 비볐다.     

며칠 뒤 아빠의 경운기를 타고 방앗간에 다녀오신 할머니 손에는 고운 가루가 들려있었다. 할머니는 오늘을 위해 아침부터 배춧잎을 소금물에 절여두셨고 뒤꼍에서 한 움큼의 쪽파도 뜯어다 장독대 위 소쿠리에 담아두셨다. 그날 저녁 밥상엔 파란 배춧잎과 쪽파가 어우러진 거무스름한 메밀 적이 올라왔고, 고생했으니 많이 먹으라는 할머니의 얘기를 들은 척도 않는 편식쟁이 나는 할머니가 젓가락으로 떼어주신 바깥 부분의 바삭바삭한 부분만 조금 맛보았으나 맛이 없다. 할머닌 평상시 밥을 아주 적게 드시던 분이셨는데 그날은 양념간장을 숟가락째 뜨셔서 메밀적에 쓱쓱 발라 맛있게 한 접시 다 드셨던 모습을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메밀꽃이 환하게 피던 자리엔 뾰족뾰족한 가시를 뽐내는 엄나무 묘목들이 심어졌다. 할머니는 이따금 장에서 누런 봉투에 끈으로 둘둘 묶은 메밀가루를 들고 오셔서


"야나 내가 미밀갈 사다 놨데이 니 미밀적 해줄래"


틀니를 드러내며 미안한 웃음을 보이셨다.    

22년 봄의 목단꽃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소화가 잘 안 되셨던 분이셨던 것 같다. 소식하셨던 것도 그렇고 할머니의 주전자에서 늘 끓고 있던 삽주 뿌리 물도 그랬다. 그래서 밀가루보다는 소화가 잘되는 메밀을 선호하시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도 예전엔 먹지 않던 음식들을 추억하며 찾는 것처럼 할머니도 분명 메밀적을 추억의 음식으로 드시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얼마 전 동네 로컬푸드에 갔는데 메밀가루가 눈에 띄어 한봉 다리 사놨다. 이번 주말은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메밀적을 한번 시도해 볼까 한다. 제목은 메밀적 꿀 무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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