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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May 22. 2022

야나할머니와 강냉이

주말을 맞은 나는 얼마 전 사두었던 메밀가루로 부추전을 만들었다. 사실 메밀이 아주 맛난 가루는 아닌지라 도토리 가루와 감자전분을 조금 넣어 바삭한 맛을 거들어 보았다. 물론 아이의 입엔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렸지만 시골집 뒤꼍에서 돋아난 봄 부추를 왕창 해치울 방법 중 하나로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거든 별미 강냉이 밥. 껍질을 벗기지 않아서 어린 시절 먹던 밥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나는 가끔씩 이 밥을 먹으면서 어린날에 맡았던 밥의 구수한 냄새와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곤 한다.


시골집에서 농사에 의존해서 살아야 했던 우리 집은 대식구였다. 조부모님을 비롯해 우리 사 남매 그리고 막내 삼촌까지. 때마다 9명의 식거리를 준비해야 하는 몫은 엄마의 부담이었고, 할머니가 매 끼니마다 제공해 주시는 나물들과 장에서 사 오시는 별미들은 엄마의 부담을 줄여주기도 했지만 그러나 긴 겨울을 나고 봄이 되기 시작하면 우리 집엔 쌀이 늘 부족했다. 산촌이라 논농사도 많이 지을 수 없을뿐더러 시골의 겨울은 지독하게도, 유난히도 길었다. 지난여름 처마 밑에 대롱대롱 걸어둔 둘둘씩 짝지어 매달려 있는 옥수수들은 이듬해 여름 우리를 즐겁게 해 줄 하모니카의 파종 씨앗이 되기도 했지만 겨울철에도 꽤나 효자 노릇을 하는 곡식이었다. 


우리는 할머니 방에 돗자리를 깔고 빙 둘러앉아 처마 밑에 걸려 있던 옥수수들을 걷어와 옥수수 알을 발랐다. 두 두둑하고 할머니가 뾰족한 송곳으로 옥수수에 공백을 한 줄 만들어 주시면 그 부분을 시작으로 바짝 말라 있는 옥수수 알들을 손으로 밀어 떨어트리거나 다른 옥수숫대로 자극을 줘서 알알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이뤄진 작업의 결과로 옥수수알이 돗자리 위로 한가득 쌓이면 풍구에 집어넣고 꼽재기들을 날려버렸고, 실한 옥수수알들만 방앗간으로 가 껍질을 벗고 쌀 속에 섞여 쌀을 대신할 곡식이 되어 돌아왔다.


옥수수밥은 따뜻할 땐 참 맛이 좋다. 하지만 온기가 사라지면 아삭아삭 소리가 나는 진정한 찬밥으로 변한다.

그 찬밥의 식감과 소리를 지금까지도 기억하는데, 특히나 할머니가 그 식은 옥수수 밥을 드시기 힘들어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할머니가 그 밥을 드실 때마다 틀니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었는데, 그때 할머니의 치아 통증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할머니의 그 치아 소리가 우습다고 계속 흉내를 냈었다. 


작년 건강검진에서 치아 전체가 크랙(치아 균열증) 진단을 받았다. 슬슬 아프긴 했었으나 피곤해서 그렇겠지,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렇겠지, 어금니를 악물고 달려서 그렇겠지, 온갖 타당한 이유를 붙이며 치과 진료를 미뤘던 결과 나는 석 달치 월급을 쏟아붓는 큰돈을 들여 치아 보수를 해야 했고, 아직까지 고생을 하고 있다. 나는 치아치료를 하는 동안 자동 다이어트가 되지 않겠냐며 가족들을 안심시켰지만 다이어트는 나의 희망사항으로 끝이 났고, 나는 치아 통증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아파보니 할머니가 치통으로 몇 날 며칠 식사를 못하시던 그 모습이 기억이 나서 슬퍼졌다.


얼마 전 친정엘 다녀왔는데 언니가 얇게 잘라놓은 참외를 드시는 아버지 치아에서 할머니한테 나던 소리가 났다. 나는 아버지에게 잇몸이 더 망가지시기 전에 얼른 병원에 다녀오시라고 권했으나 아버지는 괜찮다고만 하시고, 나는 순간 화를 누르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사실 아버지의 불편을 늦게 발견한 나한테 화가 난 거였고 그 통증을 버티시며 이 봄 농사일을 시작하신 아버지에 대한 애처로움이었는데 나는 아버지가 크게 잘못한 거 마냥 짜증을 냈다. 덜그럭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잇몸 사이로 숨어드는 참외 조각에 잇몸이 아파 꿈쩍꿈쩍 놀라시면서도 아버지는 허허허 웃으시며


"이거 어디 참외나? 잘 사 왔네. 참외가 달다 달아. 너도 먹어봐" 


딸의 짜증 덕분이었는지 아버지는 치과에 가셔서 틀니를 다시 맞추셨고, 며칠은 적응하느라 고생하셨으나 늘 하시는 말씀 "괜 자네 걱정 마르"라고 하셨다.


그간 아버지는 자식에게 틀니 뺀 모습을 보여주기 부끄러워하시며 입원하셨을 때도 커튼을 치고 치아 세정 통에 담으려 하셨었고, 거동이 불편하셔도 치아 세척은 본인이 꼭 하셨었기에 나는 아버지 치아에 무심해지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그날 우리가 왔다는 걸 잊으셨는지 아니면 당신도 이젠 내려놓으신 것인지, 나는 틀니 빼신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입모양에서 할머니를 보았고 정말 유전자의 힘은 위대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아마도 나의 모습에도 할머니의 모습이, 아버지의 모습도 엄마의 모습도 보이겠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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