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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Jun 25. 2022

야나할머니의 호로록 차

2022년 6월의 엉겅퀴

"할머이 그거 맛있어?"


"오냐 맛나다 니도 먹어볼래?"


"그건 어디에 좋아?"


"어디에 좋긴 몸에 좋지"


할머니는 대답을 하시고도 우스우신지 고정되지 않는 틀니를 드러내며 웃으셨다.


"아니 내 말은 그니까 몸 어디에 좋냐고?"


"어디에 좋냐고? 간에 좋아 간에, 느 하래비가 이 차를 잘 드싰자네"



스탠으로 된, 한쪽 구석이 찌그러진 할머니의 낡은 전용 찻잔에 담긴 차향을 쓱 맡아본 나는


"아니 나는 안 먹을래. 할머이 마이 무"


할머니는 가시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 엉겅퀴 꽃을 따다가 나물 데치실 물이 폴폴 끓으면 채반을 받치신 다음 꽃을 쪄서 바싹 말리셨다. 쪼그라 들은 꽃들은 가마솥의 위력에 예쁜 색감을 잃긴 했지만 어린 내가 보아도 엉겅퀴 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의 색은 남겨 주었다.


말술을 즐겨하셨던 할아버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당뇨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까? 우리 집 식구들은 술을 거의 접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나는 알코올을 해독하는 능력은 타고나지 못해서 회식 때마다 소주 한잔만 마셔도 거의 두 병은 마신 것 같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앉아 있으면 윗분들로부터 '술은 혼자 다 마신 거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었는데 그 덕분에 우리 집엔 차를 마시는 문화가 일찍부터 생겼던 것 같다.


어린날엔 몰랐는데 점점 자라면서 할머니가 주전자에 보글보글 끓여 드시던 차들이 철에 맞게 산과 들에서 채취하고 준비해 놓으셨다가 드시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가끔 할머니보다도 더 빠르게


"할머이 엉겅퀴 꽃 따러 안가?"


"니 앵갱키 꽃 따야 되는지 우예 알았노?"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 정도쯤이야"


"할머이 쇠뜨기 뜯을 때 안됐나?"


"니 시뜨기 뜯어야 되는 건 또 우예 알았노?"


"뭘 우뜨케 알아. 쇠뜨기 꽃이 퐁퐁 올라왔으니 뜯을 때 됐구나 알았지"

"마한년"


할머니는 내가 당신을 웃기거나 말대꾸를 했을 때

마땅한 대처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시면

'마한년'이라 표현하셨는데 그 무렵 나는 국사시간에 삼한시대를 배우고 있었다. 마한이란 부족 국가가 우리 집이 위치해 있는 영토였다는 것과 준왕이 마한을 세웠고, 고구려 동명성왕이 마한을 꿀꺽했다는 것으로 기억하면서 알쏭달쏭한 역사 속의 사건들을 기억했는데, 수업시간 선생님 입에서 마한이란 단어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자꾸 '풉'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쇠뜨기 차도 할머니가 즐겨 드시던 차였는데 쇠뜨기 차는 생각보다 만들기도 쉬웠다.

뜯어다 바싹 말려서 차로 끓여 먹으면 되었는데 녹찻잎을 우려내는 것처럼 적은 양만 드셨다.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플 수 있다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든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픈 건 맞는 거 아닌가?


해마다 할머니가 쇠뜨기를 베러 가는 전용 노다지 구역은 아버지가 벼농사를 지으시는 논으로 가는 방향의 개울가 언덕이었다. 나는 그곳을 쇠뜨기 언덕이라 불렀는데 겨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민둥 언덕이 봄 햇살에 눈이 녹고, 돌나물이 올라오고,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마치 마법을 부린 것처럼 아기 배넷머리 같은 연한 연둣빛의 쇠뜨기가 송송 올라왔고, 철쭉이 필 무렵이면 진한 초록색을 띄어가며 한 뼘 자랐고, 뻐꾸기가 울 무렵이면 두 뼘 세 뼘 자라 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이 쇠뜨기 풀의 매력은 줄기에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어 할머니를 기다리며 떼었다 꽂았다 하며 노는  재미도 있었고, 찻잎용으로 손질 후 남은 것들은 소에게 던져 주었는데 소가 우적우적하는 되새김 질을  나는 껌을 씹는 중이라고 했었다.


고향집에 마늘 수확을 도우러 밭에 가는 길에 할머니랑 쇠뜨기를 베던 쇠뜨기 언덕을 보고 사진을 한 장 찍어 두었다. 이제는 뜯어가는 사람도 없고 소도 껌을 씹지 않아서인지 쇠뜨기는 동명성왕이 영토를 확장했던 것처럼 더 넓은 영역에 퍼져 자라고 있었는데 올해도 두 뼘  넘게 자라 꽃이 퐁퐁 피어 있었고, 어린 시절  할머니가 낫으로 쇠뜨기를 베어 놓으시면 흐트러지지 않게 리어카에 차곡차곡 담던 할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라 코끝이 시큰해졌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이 말을 지키고 사는 게 할머니는 어려웠을까? 대대손손 전해 내려오던 민간요법으로 할아버지와 당신의 몸을 건사하고자 하셨던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좀 더 의학의 기술을, 능력을 의지하셨더라면 열개 아플 거 반만 아프고, 한 시간 주무시던 거 두 시간 주무시고, 육체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노년을 보내셨음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은 늘 나를 따라다닌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 시점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안타까워할 때가 아니다. 코로나 때문에 일손을 자주 도우러 가지 못한 것도 한몫, 점점 연로해져 가시는 이유가 젤 크겠다만 고향집에 가보니 농번기를 맞으신 부모님은 새보다 더 일찍 일어나셔서 새벽을 열고 일을 하고 계셨는데 야속하게도 시골은 해도 일찍 지는데 또 뜨기는 어찌나 빨리 뜨는지... 바늘 시계와 생체시계가 불일치되어 일도 하는 척만 했던 나인데 머무는 2박 3일 내내 나는 몸이 찌뿌둥했다.


피는 못 속인다고 하더니 할머니를 닮은 아버지는, 아니 점점 할머니 같아지는 아버지는 할머니를 능가하는 고집불통이시다. 부디 부모님은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아프시지 않으셔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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