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바라기 Jun 03. 2023

야나할머니와 안경이야기

무심함에 대한 후회의 글

"누구 내 눈알 본 롸암~~~"


아침부터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나의 목소리에 면도 중이던 남편의 대답이 날아왔다.


"텔레비전 앞에"


"오케이~ 땅크"


나는 텔레비전 앞에 다소곳이 놓여 있던 안경을 쓰고 안방으로 갔다.


"매번 그렇게 찾을 노력이면 장소를 정해 두고 보관하는 게 낫지 않아?"


"아니 내가 어제 안경을 쓰고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없잖아. 그러니 찾은 거지"


"당신 내가 안경 안 벗겨줬음 아마 잠결에 벗어서 깔아뭉갰을지도 몰라. 그냥 망가지게 둘걸 그랬나?"


"아니지 아니지 나는 아침에 찾는 수고를 덜려고 쓰고 잔 거라고. 그래서 선애샘은 안경 찾기가 귀찮아 집구석구석에 둔 안경이 일곱 개랬는데 나도 안경을 더 맞춰야 할까?"


"네에 그러시던지요."


짧게 날아온 남편의 말투와 목소리엔 '내가 너 때매 늙는다.'라는 표현이 담겨 있는 거 같았다.


"아! 여보 안경 얘기 나온 김에 오늘 당신 돋보기나 맞추러 가자. 나도 시력체크 좀 하게. 요즘 전보다 눈이  안 보이는 거 같애"




퇴근을 하고 남편과 작은아이와 안경점엘 갔다.

감사하게도 우리 아이들은 남편의 시력을 닮아서 인지 시력이 참 착하다. 네 식구 중에 안경을 쓰는 사람은 나뿐인데 교정시력이 1.0 정도는 되니 그리 나쁜 시력도 아니지만 요즘 시력과 청력과 운동신경과 모든 것이 둔해지고 있는 과도기에 접어들어서인지 안경을 써도 답답하고 벗어도 답답한 끝나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있는 기분이다.


"어서 오세요."


낯익은 안경사님이 맞아주셨다.


"저희 셋다 시력 측정 이랑 남편은 적당한 돋보기를 추천해 주세요. 그리고 저는 안경이 요새 잘 안 보이는 것 같아 다시 맞출까 하고요"


안경사님은 작은 아이, 남편, 나의 순으로 시력 검사를 해주시곤


"따님은 시력이 좋아서 지금처럼만 쭉 관리를 잘하시면 될 거 같고요 사장님은 시력은 좋으신데 노안이 시작되어 생활용 돋보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사모님은 시력이 크게 변동은 없어서 굳이 안경을 바꾸시라고 권하고 싶진 않고 올 가을쯤 시력 체크 하시러 다시 오세요"


"저 시력이 그전이랑 비슷하다고요? 근데 저는   요새  잘 안보일까요?"


"시력이 떨어졌다기보단 노안이 시작되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남편은 두상에 맞는 안경테를 한참만에 골랐으나 그 테에 맞는 안경알이 없어서 며칠 후 제작을 하면 오라는 답변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쓰면 제페토 할아버지가 되는 안경

며칠 뒤 남편은 퇴근길에 돋보기를 찾아왔고 또 며칠이 지난 주말, 이제 눈이 잘 보이니 그간 미뤄 두었던 조각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누구 내 돋보기 보신 부운~"


"마지막에 어디서 썼는데?"


"책 보느라 안방서 마지막으로 쓴 거 같은데 있어야 할 자리에 없네"


"탁자 위에 올려 두었음 앙꼬가 발로 떨어트렸을 수도 있어"


"그럴까 봐 안전하게 뒀는데 안 보이네"


"것봐. 안경이 본디 도망을 잘 간 대니. 이제 내가 왜 안경을 수시로 찾았는지 당신도 알겠지?"




"이 마한 것들 내 앵갱 어따 치웠나?"


성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나절에 할머니 돋보기안경을 쓰고 마당에서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걷기 놀이를 했던 동생들과 나는 안경알에 햇빛을 통과시켜 종이에 불을 붙여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다 때려치고 바깥마당으로 우르르 뛰어 나갔던 것이 떠올랐고 지금은 그늘이 져서 해가 들지 않는 뜨럭에 널브러져 있던 안경을 발견하곤 잽싸게 들고 할머니한테로 갔다.


"이 마한 것! 할미방 물건 방에서만 갖고 놀라했어 안 했어"


"할머이 미안해. 대신 엄마한텐 비밀로 해줄 거지? 안 그럼 우리 또 혼나"


"애미한테 일러서 아주 혼구녕을 내주라고 해야겠다."


나는 할머니 화가 쉽사리 풀릴 거 같지 않아서 동생들을 데리고 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저녁나절 밭에 갔던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셨고 우리는 할머니가 엄마한테 말을 건넬 때마다 움찔움찔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다행히 저녁을 먹을 때 까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양치질까지 끝낸 나는 할머니 방으로 갔다.


"할머~~이 다리 마이 아프지? 다리 피봐 내가 쭈물러 줄게"


"마한 것. 니가 지은 죄가 있어 왔제?"


"어. 인제는 할머이 물건 막 안 만질게. 그러니 화 풀고 다리 이리로 피봐"


할머니는 틀니를 한번 움직여 잇몸에 맞추시곤 다리를 내 앞으로 쭉 내미시며 웃으셨다.




"야나 늬들 이게 뭔지 아나?"


아까부터 쇠죽 간에서 부스럭부스럭하고 계시던 할머니가 내미신 것은 수수깡으로 만든 안경이었다.


"우와 할머이 이거 우뜨케 맹글었어?"


"우뜨케 맹글긴 손으로 맹글지"


할머니는 안경을 막냇동생 눈에 씌워 보시곤 안경다리를 뚝 잘라 길이를 조절한 뒤 동생의 콧잔등에 다시 얹어 주시곤


"수꾸대이 살을 요래 살살 삐끼 갈라서 안에 심을 빼내 똠방똠방 짤라 지들끼리 끼 주믄 봐라 요래  앵갱이 되잖나. 근데 늬들 같이 연한 손은 잘못하믄 수꾸대이 살에 손가락 쑥 나가 피 칠갑하니 조심해야 된데이"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삐뚤빼뚤 표 안경을 쓴 우리는 코 받침도 없는 안경을 간신히 미간에 얹고 귀에다 걸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마당을 걸어 다녔고, 나는 눈이 나빠져 엄마처럼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것도 멋지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애석하게도 나의 눈은 먼 밤하늘에 파리똥 같은 별도 다 보이고 나뭇가지 구석구석에서 보호색을 띠고 울고 있는 매미도 다 보일 정도로 시력이 너무나도 짱짱했다.




우리 아들보다 계급 높은 케로로 듕다님

돋보기의 힘이 보태져서인지 남편은 돌을 깎아 나와 딸네미에게 도장을 선물해 주었다. 대신 앙꼬가 앞발로 툭툭 쳐 떨어트리면 케로로 목이 댕가당 부러질 수 있으니 잘 보관하라는 당부를 하며 사각 도장함에 담아 주었다.


"디자인 맘에 들어?"


"응. 완전. 이렇게 만들어 줄 줄 알았으면 돋보기를 더 빨리 사주는 건데"


"다 닳아서 없어지면 다시 만들어 줄 테니 부지런히 써봐. 그리고 문구는 당신한테 바라는 나의 바람이기도 해"




항상 기쁜 삶이 되기를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유품들을 챙기던 나는 할머니의 유품 몇 가지를 들고 한참을 울었었는데 그중에 안경도 있었다.

종이에 불을 붙여 보겠다며 땡볕에 앉아 땀을 한 바가지 쏟으며 갖고 놀던 그 안경이 이렇게도 작았었나 싶을 만큼 놀라웠고 울퉁불퉁한 세상을 보여주던 안경알은 장마철 윗동네부터 떠내려와 온갖 상처를 품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마법이 잔뜩 걸린 숲에 갇힌 것처럼 잔뜩 뿌옇기만 했다.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까지 항상 안경을 콧잔등에 올리시고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셨던 할머니의 오랜 벗 안경. 나는 왜 할머니의 캄캄한 세상에 이렇게도 무심했었나? 후회가 밀려와 할머니 스웨터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뭐가 보이는가?

작은 아이가 인터넷을 보다가 선글라스를 쓰고 멋지게 서 있는 강아지와 고양이 사진들을 살펴보다 하굣길 다있소에서 귀요미 아이템이라며 앙증맞은 안경을 하나 사 왔다. 하지만 겁이 많은 앙꼬한테 절대로 씌울 수가 없었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각도를 맞춰 이  사진을 한 장 건졌다.


문득 궁금해진다.

잠시나마 비친 고양이의 눈엔 어떤 세상이 보였을까? 할머니의 안경처럼 뿌옇고 캄캄한 세상이었을까?


이제 우리 집엔 안경을 소유한 임자가 셋이 되었다. 돋보기를 쓰면 제페토 같아지는 남편을 보며 웃음도 나고 또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한다. 돌을 열심히 다듬고 갈고 색칠까지 하느라 석고상처럼 자리를 뜨지 않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남편이 뿌연 세상 대신 쾌청한 세상을 오래오래 보기를 바라며 가끔씩 안경 상태도 살펴봐줘야겠다. 할머니 안경에 무심했던 후회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를.

이전 01화 야나할머니는 놀이 슨상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