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의 사초(史草) 조작 사건

조선의 법은 사초를 조작한 사관을 엄하게 다스려 참형에 처했다

by 두류산

사초를 조작한 사관은 참형이었다


글자가 만들어지자 역사가 있었고, 역사가 있은 뒤에 시비(是非)가 밝혀졌으며, 시비가 밝혀지자 공론(公論)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무서운 것이다. 오죽하면 천하의 폭군 연산군조차도 두려운 것은 사관의 기록뿐이라고 말했겠는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위대한 기록유산을 남긴 조선에게 역사는 무슨 의미였을까?

김종서는 《고려사》를 편찬하여 임금에게 올리면서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새 도끼 자루는 헌 도끼 자루를 보아 법으로 삼고, 뒷 수레는 앞 수레를 거울삼아 경계한다고 하니, 대개 이미 지나간 흥망(興亡)의 자취는 실로 앞으로 오는 미래에 권고하고 경계함이 되므로 이에 책을 엮어 감히 임금께 드립니다.” (문종실록, 문종 1년 8월 25일)


조선에게 역사의 의미는 지나간 흥망의 자취를 되새김으로써 이를 통해 장차 다가 올 미래에 교훈을 얻는 것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역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거울이자 등불인 셈이었다.


예로부터 나라가 세워지면 사관(史官)을 두어, 국가의 중대사를 기록하였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중요성은 조선시대 사관들이 직접 쓴 글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시대 예문관 소속의 사관들이 역사와 사관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들의 견해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여러 대에 내려오는 나라마다 사관(史官)을 두어, 당시의 일을 기록하되, 아름다운 점을 가리지도 않고 나쁜 점을 숨기지도 않아 사실에 따라 바르게 써서, 하나같이 공정하여 기록에 늠름하게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함이 부월(鈇鉞, 도끼)보다도 엄하고, 만세의 경계됨이 별이나 햇빛보다도 밝았으니, 사관의 직책이 너무도 중하지 않습니까?” (중종실록, 중종 2년 6월 10일)


어느 시대보다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선발과정도 엄격하였다. 사관의 자리가 비면 춘추관의 당상으로 하여금 과거에 급제한 자로 해당 직책의 품계에 맞는 자를 모아 시험을 보게 하였다. 시험을 통해 경전과 역사에 해박하고 문장이 뛰어난 자를 뽑아, 내·외 4조(증조·조·부·외조)에 허물이 없고, 인품이 좋은 3인의 후보자를 추천하여 그중에서 선발하게 하였다.


사관들은 항상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어떠한 국가의 중대한 회의라도 참석해 사실을 기록하고, 온갖 기밀문서를 다 입수해 사초(史草)를 작성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역사로 남겨야 할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문서의 초고를 말한다. 사초는 두 부로 작성되었는데 하나는 사관들이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서 작성하여 집에 보관한 가장사초(家藏史草)이고, 또 하나는 예문관에서 보관하는 사초이다.

가장사초는 예문관에 보관하던 사초와는 달리 조정이나 민간에서 듣는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세상의 평가나 소문 등을 종합하여 기록할 수 있었다. 임금이 승하하면 곧바로 실록청이 설치되고, 선왕 시절의 사관들은 집에 보관하고 있던 가장사초를 실록청에 제출하여야 했다.


'Garbage in, garbage out' 이란 말이 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는 말이다. 아무리 훌륭한 실록이라고 해도 실록 편찬의 기초가 되는 사초(史草)가 바르게 기록되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사초를 긁어 없애거나, 도려내거나, 먹으로 지우는 조작행위를 하면 엄격한 법으로 다스렸다. 해당 사관은 참형에 처해졌다. 조선왕조실록은 사관의 일탈행위를 막기 위해 어떤 법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세종 31년 3월 2일.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춘추관(春秋館)은 사관으로서 사초를 훔치거나 조작, 누설한 자의 형벌을 정하고 이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본관(本館)에 소장한 사초는 모두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 지극히 중하여, 엄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사관이 자신과 관계되거나, 친척이나 친구의 청탁을 듣거나 하여 흔적을 없애려고 사초를 훔친 자는 참(斬)하고, 도려내거나 긁어 없애거나, 먹으로 지우는 자도 참하며, 동료 관원으로서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하는 자는 한 등급을 낮추고, 사초의 내용을 외인에게 누설하는 자는 참할 것입니다.”

세종은 춘추관의 제의를 그대로 따랐고, 이후 조선의 법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사관이 사초를 조작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예종 때의 일이었다.

어찌하여 사관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초를 조작하기에 이른 것일까?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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