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의 사초(史草) 조작 사건 (3)

민수는 한명회 등 7인의 훈구대신들과 관련된 사초의 기록을 고쳤다

by 두류산

한명회 등 권세가를 비난한 사초의 내용을 고치다


조선 최대의 사초 조작 사건을 일으킨 민수(閔粹)는 본래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선비였다. 세조 2년에 생원진사시를 실시하여 생원 100명과 진사 100명을 선발했을 때,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세조실록, 세조 2년 1월 25일)

과거의 소과(小科)인 생원진사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어 있었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진사시는 부(賦, 산문과 시의 중간 형태)와 시(詩)로 문장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3년에 한차례 실시하였다. 각각 100명의 합격자를 뽑아 생원과 진사라는 명칭과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였다.


민수는 세조 5년에 실시한 과거에서 33명을 선발할 때, 장원급제를 아깝게 놓치기도 하였다.

“처음에 시관(試官)이 민수를 1등으로 삼았는데, 임금이 고태정의 책문을 보고 말하기를 ‘재주가 뛰어났으니 1등에 둘 만하다’ 하였다.” (세조실록 16권, 세조 5년 4월 1일)

또한, 민수는 임금이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허락했는데 민수는 당당히 선발되었고, 훗날 예종의 세자 시절에 스승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세조실록, 세조 5년 6월 29일)

사가독서는 학문과 문장이 높은 정 3품 당하관 이하의 젊은 관리들에게 임금이 특별 휴가를 주어 직책은 유지한 채 직무에서 벗어나 독서 및 학문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세조의 실록 편찬을 위해 실록청이 설치될 당시, 민수는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인 봉상시(奉常寺)에서 종 4품 첨정 벼슬을 하고 있었다. 민수도 선왕 때에 사관을 지냈으므로 집에 보관하고 있던 가장사초를 책으로 묶어 실록청에 제출하였다.


실록청에서 사초의 접수를 담당하던 예문관 봉교 이인석이 책 표지에 이름을 적게 하자, 민수는 당황하였다. 실록 편찬을 감독하는 한명회와 양승지 등 여러 대신들을 비판한 내용이 있어 이름을 써넣기가 주저되었다. 얼마 전에 법이 바뀌어 제출하는 모든 사초에 이름을 적어서 내도록 되어있다고 하니, 민수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제출하였다.


민수는 사초를 제출하고 나오면서, 실록청의 당상관들이 자신이 쓴 사초를 읽을 것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났다. 자신이 쓴 사초를 대신들이 읽으면, 반드시 앙갚음을 하려 할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서서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민수는 실록청 이인석의 집을 찾아가 제출한 사초를 잠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예종 1년 4월 25일, 임금이 이인석을 심문한 기록이 이 상황을 잘 보여준다.

“민수가 신(臣)의 집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사초에 양성지와 임원준에 대해 쓴 것이 마음에 걸리는데, 하물며 양성지는 춘추관의 당상(堂上)이라 마음이 매우 편안치 않으니, 도로 가져가서 고쳐 쓰고 싶다.’고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그대의 사초는 나의 소관이 아니고, 또 나라의 역사를 다시 고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민수는 이인석이 자신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청을 들어주지 않자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 민수는 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있는 가까운 벗인 기사관 강치성을 찾았다. 강치성은 민수가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할 때 같이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를 한 막역한 사이였다.

강치성도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민수가 워낙 절실하게 말하자 제출한 사초를 빼내어 민수의 소매 속에 넣어 주었다.


자신이 작성한 사초를 받아 든 민수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서 문제가 될 만한 곳을 서둘러 찾았다.

민수는 우선 실록청 당상관인 한명회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았다.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면서 한명회와 신숙주가 반역을 도모한 것처럼 말했다’고 써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민수는 한명회와 신숙주가 이 글을 보면, 이 구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불안했다. 한명회와 신숙주가 실제로 임금을 배반하고 반역을 도모한 것이 아니었는데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뜻의 ‘불궤(不軌)’라는 말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민수는 당대 최고의 권세가인 한명회와 신숙주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하여 아예 불궤(不軌)라는 표현을 지워버렸다.


민수는 사초를 넘겨 실록청 당상관인 양성지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았다.

‘부유한 상인 여러 명이 재화를 다투다가 송사가 일어나자 임금은 사헌부에게 이를 조사하게 하였고, 이후 진행사항을 물었다. 사헌부 집의 등이 대답을 분명히 하지 못하므로 사헌부 관리 전원을 하옥시켰는데, 대사헌 양성지는 홀로 구차하게 용서를 구하여 그대로 자리를 유지하였다.’라고 써져 있었다.

민수는 붓을 들어 구차하게 용서를 구했다는 표현인 ‘구용(苟容)’을 지웠다.


훈구대신인 홍윤성에 대해서는 ‘정난공신 홍윤성이 처녀를 간통했다고 그 집안사람이 고소하므로, 홍윤성을 하옥하여 조사하였는데, 고소한 사람은 무고죄를 얻었고, 나중에 그 처녀를 홍윤성이 데리고 살았다'는 글이 보였다. 민수는 이 기록을 아예 통째로 지워버렸다.

훈구대신 김국광에 대한 기록을 보니, ‘성품이 절개가 없고 탐욕이 많았다’고 써여 있었다. 민수는 김국광에 대한 상당히 박한 평가를 완화하여 ‘김국광은 오래도록 권좌에 있어 비방이 많았다’로 바꾸었다.


그리고 윤사흔이 술에 취해서 용렬한 말을 했다는 기록과, 임원준이 의술로써 관직을 얻었다는 기록도 마음에 걸려, 수정하여 고쳐 썼다.

이로써 민수는 자신이 제출한 사초에서 한명회와 신숙주, 양성지, 홍윤성, 김국광, 임원준 등 일곱 명의 대신들에 관련된 기록을 고쳤다.


민수는 고친 사초를 은밀히 강치성에게 다시 건넸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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