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가 사초를 고친 것으로 보이니, 청컨대 국문하게 하소서
실록청 관리들이 제출된 사초들을 살펴보다가 민수의 사초에 여러 군데 부자연스럽게 고친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사실이 실록청의 당상들에게 보고되었고, 한명회와 실록청 당상들은 이러한 사실을 곧장 임금에게 아뢰었다.
"나라의 역사는 만세(萬世)의 공론입니다. 민수가 사초를 건드려 나중에 고친 것으로 보이니, 청컨대 국문하게 하소서.” (예종실록, 예종 1년 4월 24일)
예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민수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하였다.
의금부가 민수의 집에 들이닥치자, 민수는 지은 죄가 두려워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아내가 말려 멈추었다. 의금부 나졸들은 집을 샅샅이 수색하여 종이를 태우다 남은 재 등 사초를 고치면서 남긴 흔적을 수집하고, 민수를 포박하여 궁궐로 압송하였다.
예종 실록은 이날의 국문 장면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임금은 끌려온 민수를 친히 심문하였다.
"네가 사초를 고치고 삭제하였느냐?”
민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자복하였다. 임금이 민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서 사초를 고쳤느냐?”
"신(臣)이 강치성에게 청하여 사초를 빼내었습니다.”
임금은 부모의 병 때문에 휴가를 내고 고향에 급히 내려갔다는 강치성을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다시 민수에게 물었다.
"네가 고치고 삭제한 것은 어떤 기록이었더냐?”
"신이 사관으로 있을 때 전해 들은 일을 썼던 것입니다. 사초를 바칠 기한이 촉박하여 미처 수정하지 못하고 제출하였는데, 생각해 보니 사(史)라는 것은 만세(萬世)에 전해지는 글인데 전해 들은 일을 망령되이 기록함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고치고 지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전해 들은 일을 썼느냐? 선왕의 일도 또한 전해 듣고 쓴 것이냐?”
민수는 임금에게 변명하며 아뢰었다.
"신이 고쳐 쓴 것은 선왕의 일이 아니라 대신들의 일입니다.”
"네가 고치고 지운 데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전부 말해 보아라!”
"양성지와 여러 대신들이 지금 실록청에 당상관으로 있어 신이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 고쳤습니다.”
"대신들의 일을 썼다가 다시 삭제하였으니, 네가 대신들에게 아부하려는 것이다!”
"신(臣)은 단지 대신에게 원망을 살까 두려웠을 뿐이지, 실제로 아부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초에 직필(直筆)을 기록했으나, 고치고 지운 것은 오로지 재상(宰相)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유독 이들 재상뿐이겠느냐? 그 외에도 두려워한 대신들을 모두 아뢰어라.”
"무릇 재상이면 어느 누군들 가벼이 할 수 있겠습니까? 더 두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어찌 두려운 자가 없겠느냐? 민수가 오히려 숨기는 것 같으니, 그에게 장(杖)을 때려서 심문하게 하라.”
민수는 매를 맞으며 두려워하는 대신들을 떠오르는 대로 말하니, 거의 20여 명에 이르렀다.
민수가 대신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하며 거론한 20여 명의 인물 가운데 유자광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수가 언급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세조의 즉위를 도운 훈구대신이었으나 유자광이 포함된 것은 유자광이 예종 대에 들어와 남이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고 임금과 가까워져 급속히 권신(權臣)으로 부상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매를 맞으며 비명을 지르고 신음하는 민수를 보니, 임금은 세자 시절에 사제지간이었던 정이 생각이 났다. 예종은 장(杖)을 그치게 하고 결박도 풀어주게 하였다.
민수는 임금에게 자신이 집안의 외아들이니 목숨이나 보존하여 가문이 끊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애걸하였다.
한명회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원숙강이 전날에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였는데, 반드시 들은 바가 있었을 것이니, 청컨대 묻게 하소서.”
임금이 원숙강을 불러 물으니 굳이 숨기므로, 가두게 하였다. (예종실록, 예종 1년 4월 24일)
예종 1년 4월 27일.
임금은 민수의 일이 발각되면서 또 다른 사초가 고쳐진 것이 있는지 춘추관에 명하여 모든 사초(史草)의 고치고 지운 곳을 찾아서 살피게 하였다.
실록청 관리들은 원숙강이 제출한 사초에 지워서 고친 곳이 있음을 찾아내었다. 편수관 김계창이 아뢰었다.
"원숙강의 사초를 보니, ‘권남이 졸(卒)하였다’고 쓴 아래에 ‘임금이 부처(佛)를 좋아하였다’는 것과 ‘권남이 큰 저택을 지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말을 삭제하고 단지 그 ‘권남이 졸하였다’만 쓰여 있습니다.”
한명회는 원숙강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원숙강이 권남이 죽었다는 기록 밑에 임금에 관한 말을 함께 써넣은 것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임금은 원숙강을 친히 국문하였다.
(다음 편에 계속)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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