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 가서 죽은 노산군을 전하와 비교하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한명회는 집에서 밥상을 받았으나 국을 한 숟가락 떠서 먹고는 바로 숟가락을 놓았다. 임금이 자신에게 한 말이 계속 귓전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생각할수록 뼈가 있는 말이었다. 대왕대비께 한 말 가운데 마음에 걸리는 실언(失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자신을 국문하여 죄를 물으라는 상소가 올라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간들이 상소에서 무엇을 말하며 탄핵하는지 불안하고 신경이 쓰였다. 한명회는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귀양 가서 죽은 노산군을 전하와 비교하다니, 이 무슨 망발이었나?”
임금이 술상을 내려주며 위로했지만, 이후 자신을 찾지 않는 것도 불안했다. 한명회는 눈을 감고 흐트러진 정신을 모았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장(長)들은 원상들의 아들이라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대간들이 왕에 대한 충성을 경쟁하듯이 탄핵을 한다면......?”
한명회는 자신의 생각에 흠칫 놀랐다.
“이제 막 친정 체제에 들어간 젊은 임금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방향으로 일처리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한명회는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거친 사람답게 이 사태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한명회는 대비전(大妃殿)에 도움을 청했다. 자신이 이번 일의 잘못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근신하고 있다고 전갈을 올렸다.
대왕대비는 아침 문안차 들른 성종에게 한명회에 대한 걱정을 내비쳤다.
"정승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속에 근심을 품고 있다고 하니 안쓰러움을 견딜 수가 없소. 주상이 글을 내려 위로해주는 것이 어떻겠소?”
성종은 대비전을 나오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대사헌과 대사간은 탄핵하는 시늉만 하는 것인데, 상당군은 무슨 걱정을 그리 한다는 것인가.”
성종은 대비의 요청으로 승전 환관 안중경에게 어서(御書)를 가지고 한명회의 집을 찾게 하였다. 승전 환관은 승전색이라고도 불리며 왕이나 왕비의 명령전달을 담당하는 내관이었다. 왕의 명령 가운데 중요한 일은 승정원에서 출납하였으나 사소한 일은 정 4품의 승전색이 담당하였고, 왕비의 명령은 종 4품의 승전색이 담당하였다.
안중경은 한명회의 집을 찾아 임금의 글을 내려주었다.
“과인이 어린 몸으로 보위를 계승하여 모든 것을 대왕대비의 가르침에 따라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동방의 백성들이 누군들 편안하지 않았겠는가? 정승의 청이 어떠했는지는 하늘과 땅이 환하게 아는 바인데 과인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대체 무엇을 근심하는가? 산하(山河)의 맹세를 어찌 잊겠는가? 근간에 보지 못하였으니 지금 잠깐 들어오도록 하라.”
'산하의 맹세'는 국왕과 공신 간의 맹세를 말했다. 한(漢) 나라 고조인 유방이 공신을 봉하면서 ‘태산이 숫돌과 같이 작아지고, 황하가 띠와 같이 좁아질 때까지 나라가 공신의 봉토를 보존하고 자손에게까지 미치리라’는 맹세에서 기원하였다.
한명회는 임금의 어찰을 받고 즉시 입궐하여 임금에게 나아가 엎드려 사죄하였다.
성종은 한명회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대비전에서도 걱정하시니 이번 일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친정체제로 들어서면서, 훈구대신의 수장인 한명회의 기를 꺾은 것만으로도 좋은 출발이라는 판단이었다. 성종은 한명회를 위로하고 승정원에 명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도록 하였다.
사간원의 젊은 관리들은 분개했다.
“상당군은 지은 죄가 두려워 대비전에 알려서 주상을 압박하다니, 이게 신하로서 할 도리인가?”
“대사간이 소극적이니, 박숭질 사간(司諫)에게 가서 의논해봅시다.”
사간 박숭질은 김숙자의 제자로서 예종 때, 사헌부 장령으로 분경 금지법을 어겼다고 대신인 윤사흔을 탄핵하기도 하였고, 성종에게 대간도 경연에 참여하여 언제든 진언(進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성종에게 좌리공신이 책봉되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기도 하여, 강직한 대간으로 신망을 받았다.
사간원 관리들의 의견을 들은 박숭질은 대사간 정괄에게 보고했다.
“주상 전하는 한명회에게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 말라고 음식을 대접하였습니다. 이것은 주상께서도 한명회가 방자한 말을 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사간원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명회를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정괄은 아무래도 꺼림칙하였다.
“상당군을 탄핵하는 상소는 사간원 전부가 자리를 걸어야 하는 일이오.”
박숭질은 정괄을 설득했다.
“주상께서는 정승이 자신을 믿지 않고 있다는 말씀까지 했습니다. 대간들이 여기서 멈춘다면 주상 전하도 실망하실 것입니다.”
정괄은 박숭질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박 사간이 내일 경연에서 주상의 뜻을 살펴 주시오.”
다음날 경연에서 박숭질은 한명회를 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임금에게 청하였다.
“과인이 공연히 입을 열어, 대간들을 수고롭게 한 것 같다. 정승을 공격받게 한 것은 실로 과인의 불찰이다.”
박숭질은 임금이 정승을 보호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터놓고 하는 말에 탄복했다.
‘실로 성군(聖君)의 재목이시다!’
박숭질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뢰었다.
"비록 죄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해도, 삼공(三公)은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이니 마땅히 파면시켜야 할 것입니다.”
“과인이 청해서 벌어진 일이니, 어찌 그대들의 말을 들어줄 수가 있겠는가. 이제 그만들 하라.”
양사(兩司)의 대간들은 임금의 단호한 말에 한명회의 죄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는 것을 그쳤다. 대간들은 한명회의 죄를 다스려 벌을 주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그동안 탄핵이 금기시되었던 최고의 권세가인 한명회를 강하게 견제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조정은 외교적으로 중요한 일을 연이어 맞았다. 대마도에서 사신이 와서 이들을 맞았고, 답례로 대마도에 사신으로 갈 사람을 정했다. 또한 중국에서 사신이 온다는 기별이 와 의주까지 마중을 나갈 원접사(遠接使)를 뽑았다. 외교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원상들과 한명회는 오랜 경험을 살려 젊은 임금에게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였다.
한명회는 한 달이 지나도록 대간들로부터 더 이상 탄핵 이야기가 나오지 않자 한숨을 돌리며 마음을 놓았다. 이때만 해도 한명회는 머지않아 유자광의 탄핵으로 두 사람이 크게 격돌하게 될 것을 알 수 없었다.
(일러스트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