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은 한명회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보였다
한명회는 서둘러 지필묵을 찾았다.
‘나를 천하의 간신들과 견주고 역모까지 거론하였으니, 어찌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한명회는 붓을 들어 먼저 노산군을 입에 올린 데 대한 해명부터 하였다.
“유자광은 신(臣)이 전하를 노산군에 견주어 도리에 어긋나는 무례한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다만 대왕대비에게 청하면서, 노산군이 나이 어리고 보호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간신들이 결탁하여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진 것을 세조께서 이들을 주살하여 제거하고 시국을 진정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주상께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시어 태평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은 모두 대왕대비의 덕분인데, 갑자기 정사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시니,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유자광이 이 말을 가지고 왜 도리에 어긋났다고 하며, 예의가 없다고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한명회는 붓을 먹에 적시면서, 자신이 노산군을 입에 올린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어린 주상이 즉위 후 귀성군의 반란 조짐이 있지 않았는가? 재빨리 귀성군을 처단하여 화근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누가 알겠는가.’
귀성군 이준은 성종 즉위 2달 만에 반역 혐의에 연루되어 영해(寧海, 지금의 경북 영덕 지역)에 유배를 갔다가 결국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한명회는 유자광이 상소에서 자신이 천거한 사람이 많으며, 위세에 겁을 내어 한 사람도 잘못을 말하는 자가 없다고 한 말에 대해 해명하였다.
“인재를 천거하는 것은 재상의 일입니다. 신(臣)이 비록 공적은 없으나, 토포악발(吐哺握髮)하면서 현인(賢人)을 예우하고 쉬지 않고 힘을 써서 인재를 천거하는 것을 제 임무로 삼고 있습니다. 유자광은 조정에 있는 많은 신하들이 신(臣)이 이끌어주었으므로 신의 위세에 겁을 낸다고 하는데, 신에게 은덕을 입은 사람은 누구이며, 위세에 겁을 내어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신은 청컨대 대질하여서 유자광이 누구는 은덕을 입었고, 누구는 두려워서 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신(臣)은 권력을 남용하고 위세를 떨친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능히 말하지 못한다면, 유자광은 군주를 속이고 뭇사람을 속이는 죄를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토포악발(吐哺握髮)은 밥을 먹거나 머리를 감을 때에 손님이 오면 먹던 밥은 뱉고(吐哺), 감던 머리는 쥐고(握髮) 나가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인재를 대하는 자세를 말했다. 주(周) 나라 주공(周公)이 아들에게 해준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라의 일꾼을 얻기 위해 어진 선비를 우대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한명회는 잠시 붓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실타래처럼 엉키고 뭉쳐서 한꺼번에 비집고 나왔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붓을 들었다.
“신(臣)은 평소에 집사의 정원이 거의 2백 명이나 된다는 말을 들었던 까닭으로, 관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조의 낭관들이 자신들을 임명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신의 이 말은 무심결에 나온 것이므로, 전하를 속인 것도 아니고 칭찬을 바란 것도 아닌데 유자광이 조고(趙高)가 진(秦) 나라 이세 황제에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것과 같다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주상께서 노신(老臣) 때문에 이세 황제에게 견줌을 당하시니, 어찌 지극한 덕망을 손상시킴이 아니겠으며, 어찌 청사(靑史)를 더럽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臣)은 몹시 분개함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제 목숨을 끊고 싶은 심정입니다.”
승지 임사홍은 한명회의 상소를 들고 임금에게 나아왔다.
“상당군의 상소입니다.”
성종은 임사홍이 올린 상소를 펼쳤다.
“신(臣)은 다른 뜻이 없이 노산군을 말했습니다. 전하를 노산군에 견준 것은 신이 아니라, 오히려 유자광입니다. 불경(不敬)한 말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유자광과 더불어 한 번 대질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게 하여 주소서. 신이 만약 도리에 어긋나고 예의가 없었다면 죽음의 벌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종은 과연 한명회가 자신을 죽은 노산군에 비유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한명회의 상소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변명하고, 그 죄를 탄핵한 유자광에 대한 분노로 가득하였다. 성종은 읽기가 거북하였다. 상소를 옆에 밀쳐두고, 승지를 물러가게 하였다.
임금은 다른 일로 시간을 한참 보낸 후, 상소를 다시 펼쳐보았다.
“여러 역적이 계획을 꾸밀 적에 모두 먼저 신(臣)을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성종은 한명회의 글에 코웃음을 쳤다.
“상당군을 공격하는 유자광이 오히려 역모를 일으킬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성종은 상소의 마지막 글을 읽었다.
“신(臣)이 원통하게 생각하는 것은 유자광이 신을 조고에, 전하를 이세 황제에 견주는 것입니다. 이런 망발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차면 기운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늙은 몸을 놓아 보내어 여생을 보전하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임금은 노대신(老大臣)이 사직을 무기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을 자주 보아왔었다.
성종은 승지 임사홍을 불러 말했다.
“상당군이 사직을 허락해달라고 하는구나.”
“주상께서 즉위하신 후 상당군은 대간의 탄핵을 받을 때마다 사직을 청했고, 그때마다 탄핵한 대간들이 오히려 화(禍)를 입었습니다.”
임금은 상소를 내리며 말했다.
“상당부원군 집에 가서 이 상소를 그대로 돌려주어라.”
한명회는 임사홍이 가져온 상소를 돌려받고, 답이 없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한명회는 임사홍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는가?”
“그냥 돌려주라고 하시고,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임사홍은 이 날따라 한명회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보였다.
(일러스트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