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경의 마지막 소설

그림 소설

by 희원이

[목차: 자기만의 방이 없는 죄로]

♬ 회사원 은주

♬ 퇴사

♬ 결혼

♬ 은희의 기억

♬ 이주와 이혼

♬ 은희와 여경

♬ 여경의 마지막 소설

♬ 예상치 못한 사건

♬ 동거

♬ 에필로그


[소개말]
- '자기만의 방이 없는 죄로'는 놀이글 스타일을 적용한 그림 소설입니다.
- 또한 ‘가상 다큐 인터뷰 미편집본’의 형식, 또는 ‘다큐 인터뷰 문체를 적용한 에세이 소설’ 형식을 취했습니다. 감독에게 각 인터뷰 대상자가 인터뷰를 하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 이미지는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여경 씨의 소설은 페미니즘 계열의 엉뚱발랄한 뒤죽박죽 B급 소설이라 할 수 있었다. B급이란 말을 붙이는 것이 온당하다면. 그런데 처음으로, 그녀가 쓴 마지막 소설은 어쩐지 마음에 와닿는다. 은희로선 그 칼날 같은 분노가 소설에서 잘 살아있어서 그런 것이라 느꼈다. 여전히 투박한 면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그래서 좋게 다가오는 글도 있기 마련이다.





IMG_2059.PNG → 서술자 은희, 75년생


♬ 여경의 마지막 소설


여경 씨가 쓰는 피해자 여성의 복수 이야기에 대해 어째서 불만을 느끼는지 정리해본 적이 있어요. 우선 일반적인 여성 복수의 이야기를 보면 대개 피해자가 여성이 되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그것까지는 사적 복수의 정당화를 위해서 당연한 설정이라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여성은 위험에 빠지고 사건의 희생자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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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죠. 이런 상황에서 홀로 복수를 실행하려 하지만, 힘이 없고요. 그래서 은밀하게 음모를 계획하고 남자를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거예요. 조금 교활할 수 있지만, 그 역시 복수의 명분 덕분에 정당화됩니다. 그들은 단계적으로 조금씩 복수를 진행합니다.


그렇게 음모의 주도권을 쥐고 신처럼 남성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죠.

반대로 들키거나 급박하게 복수를 결행해야 할 경우, 고통 받지 않기 위해 미션을 완수하고 자결을 택하는 경우가 많고요. 이런 경향은 최근으로 올수록 드물어지는 편이고요.


그런데 여경 씨는 조금 더 강렬하게 직선적이며 블랙위도우와 같은 슈퍼히로인을 원했어요. 그것도 진부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SF적인 혁명을 꿈꾼다고 하더군요. 육체적 초월을 통하여 남성과 대등해지면서 끝내는 모든 국가의 가치를 전복하여 여성의 가치가 주류로 등장하는 상상을 한다는 거죠.


그걸 공상이라고 이름 붙였더니, 그녀는 조금 서운하다는 반응을 보였었죠.

그래서 다시 정정했죠. 그런 상상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만화 쪽 매체가 낫지, 소설에선 쉽지 않을 거라고요. 이때 제게 소설이란 사실주의적 순문학을 의미했나 봐요. 장르문학의 저변이 넓어진 이때에도 완고한 영혼이 내 안에 사는 걸까요?

영화에서조차 공중제비를 3회전씩 하면서 싸우고, 주인공을 향하는 총알이 다 비껴 나가는 장면을 너무 싫어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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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그런 장면은 안 된다!”


특히 여경 씨와 마지막으로 합평했던 작품은 너무 도발적이었어요.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지지만, 역설적으로 아픈 느낌도 들었는데 처음으로 이런 방식으로 나아가는 게 낫겠다고 촌평했었죠.

정말이지 슈퍼히로인이 자경단처럼 나서는 건 싫거든요. 사적 복수 자체는 공감하지만, 마치 벌이 자신의 침을 쏘고 죽는 것과 같은 모습이 더 예술적이라 느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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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요. 왜냐하면 어쩐지 누군가의 일화일 수도 있을 상상이 있거든요. 어떤 상상은 말이 되지 않아도 허황된 공상과는 다른 결이 있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대개 과장과 은폐의 껍데기 안으로 숨겨져 있어도 그 알맹이까지 지어낸 것은 아니라고 보거든요.


설정이 과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면서도, 어쩐지 요즘 있을 기막힌 사연의 주인공을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살인자지만,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을 그 사람에 대해서요.

그래도 어쨌든 살인자일 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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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안타까운 일이죠. 사적 복수심이란 과잉된 분노일 수도 있지만, 국가가 제대로 공적 응징을 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기도 하니까요. 사적 복수는 처연한 순간을 과하지 않을 때라야 아릿한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아직 작중인물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걸까요? 인물의 결행에 대해 너무 쉽게 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좋아할 수 있었죠. 문장 하나가 맥락 없이 머릿속에서 오래 맴돌았거든요.

“아편처럼 암암리에 소문이 번져나가고 있었지만, 다들 쉬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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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설은 마음에 든다. 뭔가 묘하게 매력적이고 거친 힘이 있어.”


그날 여경 씨와 술을 마시면서 작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이상하게 끌리지만, 그 투박하게 과격한 설정이 정직하면서도 못내 촌스럽게 느껴진다고도 했죠. 여경 씨도 정확하게 봐주었다면서 털털하게 웃으며 내게 고맙다고 해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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