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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Dec 16. 2023

지식재산권 논의에 앞선 세 가지 전제 #2

놀이글 & 칼럼

[목차: 저작권 태양계와 원시블랙홀]

◑ Part1. 지식재산권, 무형자산의 사유재산화

♬ 지식재산권 논의에 앞선 세 가지 전제

♬ 무형자산을 사유재산으로 확보하라

♬ 지식재산권: 기업의 의지가 과도해지면(1)

♬ 지식재산권: 기업의 의지가 과도해지면(2)

♬ 지식재산권: 기업의 의지가 과도해지면(3)

♬ 지식재산권: 기업의 의지가 과도해지면(4)

◑ Part2. 저작권 태양계와 원시블랙홀

◑ Part3. 몽상, 예술민주사회주의

→ 소개글 및 상세 목차 더보기 


- 여기서는 ‘지식재산권이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이었다’는 첫 번째 전제를 깔 것이다.
- 두 번째 전제는 1970년대와 관련 있다. 어쩌면 1960년대일 수 있으나 어쨌든 자본주의가 성숙해지면서 지식재산권의 확장에 가속도가 붙은 시기를 1970년쯤으로 보았다.






앞으로 논의할 지식재산권은 이러한 배경에서 그 발달이 더욱 가속화된다. 그 전에 특허권이나 저작권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팽창, 즉 우주적 빅뱅과도 같이 지식재산권 역사의 새로운 물꼬가 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1886년의 베른협약을 기점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저작권을 국제적으로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체결되었는데, 정식 이름은 ‘문학 및 미술 저작물 보호에 관한 국제협정(協定)’이었고, 만국저작권보호동맹조약이라고도 불렸다. 2006년 기준으로 162개국이 가입되었다니, 거의 모든 나라들이 가입한 셈이다. 






저작물이 완성되는 순간부터 특별한 절차 없이 저작권이 발생한다고 보는 무방식주의였다. 사후부터 저작권보호 기간을 산정하는 사후기산주의(死後起算主義)로 되어 있으며, 브뤼셀 규정에서는 ‘사후 50년보다 짧아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문화재를 약탈하던 시대인 걸 상기한다며 모든 국가의 창의나 문화를 지키려고 한다기보다는 서구의 무형자산을 보호할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라 비판받을 수는 있다.


“죽기 바로 직전에야 유명해지면 너무 억울한데, 사후기산주의가 있어 다행이죠. 가족이라도 혜택을 입을 수 있으니까요.”

“살다 살다 제 무덤을 도굴당할 줄은 몰랐죠.”






물론 시기에 관한 이견도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다.


“이미 15세기경 인쇄 매체의 발달로 출판 독점권, 비조합원의 무허가 인쇄물 처분 권한 등에 폭넓게 관심이 생겼고, 앤 여왕이 영국 재위 시절이었던 17세기 때부터 저작권법이 확립되었다고 하잖아요. 또 동아시아에선 저작권 개념이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착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에 반박해서 조선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저작권 의식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주장도 있고요.”






“글쎄요, 국지적으로 저작권 개념이 자리를 잡아갔다고 해서 이를 광범위하고 주류적으로 강력한 문화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나요? 유럽에서 표절이 많이 있었던 것 같고요. 그만큼 표절과 저작권 관행이 느슨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 세계적으로 보면 과연 저작권이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나요? 근대에 말이죠. 동아시아에서도 저작권 갑부가 있었나요? 막 섬을 사서 선물할 만큼요.
유럽에서도 창의적인 예술가는 후원을 많이 받아야 했잖아요.” 






이처럼 여러 주장이 대립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지식재산권이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이었다’는 첫 번째 전제를 깔 것이다. 20세기 현대 자본주의의 성장과 맞물려서 과학 등을 통해 급격히 생산된 무형자산을 더 철저하게 사유재산화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고 보았다. 


“20세기엔 일단 현대 자본주의가 성립하고 대량 생산이 위력을 더하니까요. 둘째로 식민지 착취 경제에서 세계 자본주의 경쟁으로 이동하니까요. 식민지를 착취할 때는 좀 느슨하기 마련이죠. 생산하면 팔릴 곳이 있으니까요. 20세기에는 그게 여의치 않아졌죠. 경쟁은 심화되고, 과학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기술 우위를 실현하고 이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죠.” 






즉 19세기 베른협약 때부터 세계적인 합의의 전환점을 마련한 뒤, 자본주의가 현대에 들어서 무르익고 식민지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무형자산을 사유재산화하는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고 본 것이다. 이때 과학 기술 등의 발달, 세계 경제가 활발하게 무역할 환경이 갖추어지고, 고도화된 자본주의와 맞물리면서 기술을 보호하는 데에 더 철저해졌다. 선진국으로선 식민지를 착취할 때와는 달라진 상황에서 지켜야 할 권한에 더 민감해졌다.


두 번째 전제는 1970년대와 관련 있다. 어쩌면 1960년대일 수 있으나 어쨌든 자본주의가 성숙해지면서 지식재산권의 확장에 가속도가 붙은 시기를 1970년쯤으로 보았다. 대중음악으로 보면 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와 부합한다. 정확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유럽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에서 마셜 계획 등으로 경제 재건 사업을 한 뒤로 보았다. 재건 사업으로 빠르게 회복한 유럽에서도 다시금 자본주의 시장이 성숙하고 포화한 시점에 이르렀고 1970년대가 그랬다.






“유럽은 폐허에서 다시 일어섰죠. 냉전 논리 덕분에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인 마셜 계획에 따라 재건되죠. 이미 모든 무형적인 자산을 갖추고 있는 곳이었죠. 역사 문화, 기술 인프라 등이요. 그들에게 필요한 건 충분한 자금이었겠죠. 그러면 내재된 지식을 활용해서 경제와 국방을 재건할 수 있었죠. 우리나라가 ‘맨땅에 헤딩’ 하는 느낌으로 모든 걸 새롭게 해야 했던 것과는 달랐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경험이라는 무형 자산을 보유했던 친일파를 행정 요직에 앉히게 되잖아요. 그래서 역사적 가치관이 왜곡되는 문제가 발생하지만요. 유럽은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미국으로선 냉전 논리 때문에 자기 진영을 향해 사다리 걷어차기를 할 수 없었죠. 만일 지금이라면 후진국이 선진국의 견제 때문에 빠른 성장이 어려웠을 거예요. 우리나라로서도 그런 점은 다행이었죠.”
“유럽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빨리 성장해서 안정세를 찾죠. 50년대와 60년대를 지나면서 다시금 옛 위용을 찾았다고 해야겠죠? 많은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이 여전히 그 지식이 없어 가난과 독재에 허우적댈 때 말이에요. 산업적으로는 정돈이 됐다고 봐야 했어요. 
프랑스의 68혁명처럼 새로운 세대의 열망이 표출되던 때고요. 또 팽창하는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할 만큼 구조적으로 압박이 있었다는 방증 아닐까요?”

“이제부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소비 경제라고 해야 할까요. 이제 소비하지 않으면 난감해졌죠. 생산력에 대해 소비력이 어느 정도는 비례해야 했죠. 그게 뭔지 제대로 안다고 할 순 없어도, 확실히 자본주의는 과거와 달라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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