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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Feb 13. 2024

탈저작권과 카피레프트 & 카피레프트여, 수면 위로

놀이글 & 칼럼

[목차: 저작권 태양계와 원시블랙홀]

◑ Part1. 지식재산권, 무형자산의 사유재산화

◑ Part2. 저작권 태양계와 원시블랙홀

♬ 저작권에도 기만적인 요소가 있다

♬ 어째서 지식재산권 중 저작권인가?

♬ 저작권 태양계

♬ 태양계 너머 원시 블랙홀, 탈저작권

♬ 탈저작권과 카피레프트에 관한 주석

♬ 카피레프트여, 수면 위로 드러나라

♬ 태양계가 속한 우리은하, 문화향유권

♬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해야 할 의무

◑ Part3. 몽상, 예술민주사회주의

소개글 및 상세 목차 더보기


- 현재로선 사실상 카피레프트만이 역사적으로 실재했기에 탈저작권과 거의 동의어로 보아도 된다.
- 저작권자의 관용 여부에 좌지우지되지 않으려면, 먼저 그들에게 합당한 보상책으로 노동의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래야 문화향유자의 입장에서도 향유 대상인 창작물에 대해서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다.






♬ 탈저작권과 카피레프트에 관한 주석


사실 탈저작권이란 표현을 적극적으로 적용할 계획이었다. 이는 의도한 대로라면 카피레프트보다 훨씬 큰 영역이다. ‘저작권의 영향권 바깥에서 저작권과 엇비슷하게 대응되는 모든 권리의 집합’이었다. 즉 저작권 이외의 여집합 영역에서 가능한 모든 대안 가치를 의미했다. 그 정도의 느낌으로 탈저작권이라 표현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의욕일 뿐이고, 실질적으로 카피레프트와 카피라이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개념 역시 엄밀히 보면 사유재산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기준으로 정도의 차이를 드러낸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외 다른 기준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의미랄까.

현재로선 사실상 카피레프트만이 역사적으로 실재했기에 탈저작권과 거의 동의어로 보아도 된다.






“카피레프트라고 하니 카피라이트를 반드시 상정하고 균형을 이뤄야 할 것 같은데, 탈저작권이라 하니 저작권 너머의 영역으로 탈출해야 할 것 같긴 하네. (웃음) 그래, 그냥 혼재해서 두루뭉술하게 쓰지 뭐.”






어차피 용어는 임의적이다. 사실상 탈저작권을 카피레프트와 동일어처럼 보아도 된다고 했지만, 점점 용어의 쓰임새도 달라진다. 카피레프트란 용어 역시 세월이 변하면서 조금씩 약동하는 생명체처럼 변화한다. 저작권이 강해진 시기에 카피레프트는 카피라이트의 개념 안에서 활용되는 선택안, 앞서도 말했듯, 저작권자의 관용이나 전략적 선택의 하나로 남기도 한다. 최근에 카피레프트란 이런 정도의 공유 정신, 기업의 지혜 정도로 보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는 그런 온건한 방식보다는 좀 더 원론적인 개념으로 카피레프트를 바라본다. 저작권자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도출한 명분에 따라 인류의 유산을 생산적으로 공유하고 활용하는 신념, 사유재산으로서 창작품을 인정하지 않는 접근법으로서 카피레프트를 바라본다.






“어차피 저작권자의 관용에 따른 전략적 공유는 저작권의 영역에서 충분히 검토했으니까요. 유튜브 기억나시죠?”


탈저작권으로서 카피레프트의 요소는 공산주의적 개념에 가깝다. 물론 정부에 모두 귀속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공유한다는 의미지만.






♬ 카피레프트여, 수면 위로 드러나라


카피레프트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공유의 이상을 말하면서도 지속가능성에 대하여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 사실 카피레프트와 결이 잘 맞으려면 공산주의적 체제가 더 적합한 면이 있다.


예를 들어 국가 주도로 창작자에게 경의를 표하여 이름으로 기리고, 대신 당에서 보상하는 방식이겠다. 그 작품은 여러 방식으로 새로운 창작에, 또는 시민들의 건전한 문화 향유에 도움을 줄 것이다. 다만 자유로운 공유와 개작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신성한 정전과도 같은 작품은 저작재산권의 문제보다는 풍기를 문란케 했다는 이유로 처벌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분명 자본주의에서 제재 받는 이유와는 다르다. 만일 자본주의 내에서 카피레프트로도 확실한 보상책이 있다면, 오히려 공유 자산으로 자유로운 개작 활동을 하는 것에서 공산주의 체제보다 나을 것이다. 개작의 범위를 공산주의 체제에서 정해주는 것과는 달리,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비교적 폭넓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해진다면 문화의 다양성과 종합적인 발달에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러한 보상책을 제시할 수 없기에 이상적 주장만 가지고는 지속가능한 인기를 얻을 수 없었다. 카피레프트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폄하되거나, 의심받거나, 부정당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선 이미 카피레프트의 규칙도 그리 낯선 신념을 아니다. 예를 들어 저작물을 자산화해서 그것에 가격을 매기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수고비를 주곤 한다. 클래식이나 국악으로 준 공무원처럼 취직한 연주인이라면 월급을 받는다.






“자본주의 안에서 그걸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분명한 보상책이 필요하지만, 그런 게 불명료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열심히 일했는데, 그 대가를 영구히 나누어 가지라는 말을 창작 노동자에게 한다면, 그들로선 ‘씨알도 먹히지 않을 헛소리’라 반응하겠죠.”


“아, 이젠 나보고 꽃 향기 맡으며 살라 하네. 이슬만 먹고 살라 하네.”






과거에는 귀족이 후원을 했다. 어차피 저작권을 지키기 어려운 지리적 한계 등으로 먼 타국에서 누군가 자신의 작품을 개작해서 연주하여도 쉽게 통제하기 어려웠다. 또 악보 이외에 음반을 팔아서 큰 돈을 벌 수도 없었고, 공연이 세계적으로 흥행할 수도 없었다. 지금만큼 체계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저작권 갑부가 출현할 수준은 아니었던 셈이다. 1조 단위의 매출을 올리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위상과 비교한다면, 그 출현 빈도도 낮고 인기 음악가도 주로 지역 위주의 공연료나 작곡료, 후원금 정도만이 부의 출처였다. 음반과 광고, 세계 단위의 공연 투어 등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신분 면에서 타국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공연 비용에 부담을 느껴서도 안 되고, 시기도 맞아야 했다. 소수에게만 그런 행운이 허락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귀족의 후원에 의지하던 시절이었다. 즉 카피레프트라고 해서 무조건 공짜로 남의 물건을 가로채는 것으로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저작물 자체를 사유재산화하여 물신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라 보아야 한다. 창작품을 인류의 소중한 공유자산으로 인식하고 최초로 제안했거나 다양한 변용에 기여한 창작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그 기여도를 계산해 보상하는 방식을 확립하려는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수익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입장도 있겠지만요.”


“이런 귀한 작품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도 되나? 작가가 생계 걱정 없이 글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이때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 안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보상책이 가능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기업에 매년 수백억의 매출을 올렸던 콘텐츠에 대해 10억만 벌라 하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이미 저작권의 확립으로 수익을 거둬본 현대인들에게 이에 걸맞은 대응책이어야 카피레프트를 논의해 볼 만하겠다.


저작권자의 관용 여부에 좌지우지되지 않으려면, 먼저 그들에게 합당한 보상책으로 노동의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래야 문화향유자의 입장에서도 향유 대상인 창작물에 대해서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다.

카피레프트와 카피라이트가 균형을 이룬다면, 생산자 일방이 주도하고 그 시혜적 태도 혹은 전략적 태도에 끌려다니지 않고, 창작자와 향유자 모두에게 능동적인 상보 관계가 가능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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