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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본 사람이 늦바람 안 든다

소싯적 놀던 기억으로 살기

by 루이제

중학교 2학년 초반, 우리 학교에 갓 전학 온 친구 S가 있었다. S는 이전 학교에서 소위 '노는 아이'였는데 부모님의 이혼 등으로 아빠와 함께 우리 동네에 이사를 오게 되었다. 첫인상부터 자아가 강렬해 보였고 어딘가 친해지고 싶은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S에게 먼저 다가갔고 우린 순식간에 단짝이 되었다. (그 친구는 '단짝'이라는 말을 무지 싫어했겠지만.)


나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모범생이었다. 1학년 1학기 때 1반 반장을 해서 수련회 날 전교생 앞에서 지휘를 한 적도 있었고,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그러나 2학년 때부터는 왠지 놀아보고 싶었다. 이때 아니면 놀 수 없겠다는 확신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갓 전학 와서 아직 분위기 파악 전인 S와 냉큼 친해지고자 다가갔다. 매일 하교도 같이 하고, 학교 끝난 뒤엔 우리 집에 놀러 가거나 그 친구 집에서 놀다 보니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S는 나같이 얌전한 친구와 어울리는 게 처음이었고, 나도 반대로 그러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는 담배를 피웠고 나는 옆에서 기다렸다. 친구는 내게 담배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권하지 않았다. 가끔 아빠에게 담배를 걸려 얻어맞거나 외출금지를 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내 가방에 대신 맡아 보관해주기도 했다. 내 가방 밑바닥에서 풍기던 알싸한 말보로 레드 냄새가 아직도 코에 남아있는 듯하다.


S의 취향은 중학교 2학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위 레벨에 있었다. No doubt의 Don't speak 같은 어디서 알아왔는지 모를 외국 노래들을 잘 알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친구의 취향을 동경했다. 노는 애들이 그렇듯 화장으로 자기를 잘 꾸몄고 나의 착한 인상을 바꿔준다며 눈썹 정리를 해주고 화장을 시켜주곤 했다. 그러다 하루는 내 눈썹을 확 밀어버려서 나에게 싹싹 빌며 자기가 맨날 아침에 그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아침마다 매일 성실하게 그려줬다)


https://www.billboard.com/music/music-news/no-doubt-dont-speak-video-one-billion-youtube-views-12353


No Doubt - Don't Speak(https://www.youtube.com/watch?v=TR3Vdo5etCQ)


반면 내게도 그 친구에게 없는 게 있었다. 인프라(안정적인 인터넷 연결이 되는 컴퓨터)를 갖춘, 아늑하고 부모님이 없는 집. 그리고 아빠가 사준 최신 디지털카메라. 우리 집도 맞벌이였기 때문에 낮엔 부모님이 집을 비웠고 나이 차이가 7살 나는 오빠는 어쩐지 항상 집에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학교 끝나고 오면 교과서를 보면서 혼자 예습 복습을 하거나 하면서 공부를 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이제는 S와 버디버디나 싸이월드를 하며 노는 게 일상이 됐다. 우리는 놀러 가면 디카로 사진을 찍어서 편집해 미니홈피에 올렸는데, 당시 폰 카메라가 아직 고도로 발달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다른 애들보다 한참 앞서갔다.


우리는 의외로 유머코드가 잘 맞았다. 아무 개그 소재도 필요 없이 지나가다 본 전단지 한 장, 아이스크림 하나 가지고도 장난치며 미친 듯이 웃곤 했다.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많이 웃어본 때일 것이다. 친구가 나를 꾸며주기 시작하면서 남자애들에게 인기도 많아졌다. 고백도 셀 수 없이 받았다.


그러다 우리는 1명과 더 어울리게 되었고, 또 다른 학교에서 온 전학생 1명이 더 늘어나 4명 그룹이 되었다. 우리 4명은 노는 남자애들과 어울려 다니거나 오빠들과 놀며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그러다 소위 '꽐라'가 된 적이 몇 번이나 있다. 술 먹고 쓰러진 나는 친구 집에 업혀갔고 우리 아빠에게 다시 업혀서 집에 돌아왔다. 그 뒤로 집에서는 불호령이 떨어져 방과 후 더 이상 다른 짓을 못하도록 학원을 다니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학원 땡땡이를 치고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거나 수업에 지각·결석해서 선생님에게 핸드폰을 일주일 뺏기기도 했다….


나를 제외한 친구들은 전부 한부모가정이었고 항상 용돈이 충분하지 않았다. 대중교통은 다 몰래 넘어서 무임승차. 시내에 놀러 가면 옷가게 등에서 물건을 훔쳤고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삥을 뜯'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그러지 말라고 정색했기 때문에 그 뒤로 내가 있을 때는 삥을 뜯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나는 학교에 줄인 교복을 뺏기고 머리를 잘리기도 하고, 담배 피우는 학생 목록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재수 없게도 나는 전교 5등이었다.)


친구들과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어울려다니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를 가면서(개중에는 그마저도 바로 그만두고 잠적했다) 우리 4명 그룹은 해체된다. 그 뒤로도 연락이 되는 친구는 S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는 공부를 해야 된다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온통 이 친구일 정도로 내게 중요한 존재였다. 그 뒤로 내가 대학생이 된 20대 초반까지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고 S의 엄마에게서 S를 찾는 전화가 종종 오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도 연락이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삼십 대가 된 지금까지도 나는 S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 S의 행방을 찾아보려고 하기도 했지만 다시 만난다고 해도 아마 그때의 우정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녀의 존재가 나에게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범생이인 나와 놀아줘서? 내 성격을 바꿔줘서?


물론 일부 사실이다. 이미 놀아본 그 친구에게 나는 원칙에 갇힌 답답한 모범생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수업 시간에 매일 시답잖은 쪽지를 주고받았는데, 때론 아주 직설적인 편지도 있었다. 예를 들면 자기한테 팔짱 끼고 다니려는 모습이 자신감 없어 보인다든지. 그런 직언(?)들로 인해 나는 소심한 성격을 아주 많이 고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한 시절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S는 자기의 취향을 나와 공유했고 나는 기꺼이 스스로를 바꿔가며 곁을 내주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아주 많이 바뀔 수도, 구부러질 수도, 그러다 다시 펴지거나 돌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내 중요한 부분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지만 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뿌리를 송두리째 뽑지 않아도 핵심을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S가 장식했던 내 인생의 한 시절이 너무나 소중해서 가끔은 돌아가고 싶을 만큼 그립기도 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놀 수 있을 때 놀아본 사람은 미련이 없다는 것이다. 노는 건 때가 있다. 20대 30대 아니면 그 이후에 늦바람에 들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 육아를 하면서도 '일찍 놀아봐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아이를 위해 살다 보면 나를 위한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때론 놀고 싶은 욕구가 폭발한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친구들과의 약속에 가서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다. 몸이 이미 '육아체제'에 익숙해져서 항상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서도 안 되고, 술병이 나서도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아기를 돌보고 책임져야 하니까. 하지만 후회나 아쉬움은 없다. 어릴 때 실컷 놀아봤으니까!


결론적으로, 놀아본 기억은 육아에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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