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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완벽한 불균형

육아의 전형적 성별화

by 루이제


나는 무엇에 이렇게 화가 났을까? 여기 있는 나를 보면서 화가 나.

나는 교육받았고 세상 물정을 알고 이혼도 해봤고 심리 상담도 받은 여자로,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집안 살림, 정신노동, 육아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어. 우리에게 과연 대안이 될 생활 방식이라는 게 존재할까? 노동의 분배에 대안이란 없어.

어쩌면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껴왔기 때문에 더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지. 나는 다른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라 살았어. 짚으로 엮은 집을 짓고 등반가이자 탐험가이자 작가라는, 결코 전형적이지 않은 직업을 가졌지. 하지만 지금 우리 가정의 너무나 전형적인 모습에 화가 나.

나는 여자 친구동료와 저녁 먹으며 빨래에 관한 수다나 떨고 싶지 않아. 우리 모두 여성의 분노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는 걸 인정하고 실은 나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털어놓으면 좋겠어.

마이카 버하르트, <이토록 완벽한 불균형> 中


마이카 버하르트는 세계 정상급 등반가, 그중에서도 위험하다고 손꼽히는 빙벽 등반가로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노지양 번역가가 옮기고 '무소속 생활자' 팟캐스트에서 소개해서 알게된 책인데, 육아 중에 겪는 감정의 파도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묘사한 글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날것 그대로여서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육아를 하다보면 너무나도 전형적인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에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다. 사회구조상 엄마가 육아휴직을 오래 하고 주양육자를 맡으면서 고착화되는 게 크다. 젠더 수행을 역행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꼬박 1년은 나는 집에서 아기를 봐야 하고, 남편은 나가서 돈을 벌어와야 하니까.


엄마들과 만나서 아기와 집안일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그게 지금 내 일상이므로) 뭔가 본질적인 게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일에 관한 이야기, 사회현상에 대한 이야기,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 취향에 대한 이야기 등은 끼어들 틈이 없다. 나라는 존재의 개별성, 고유성은 지워지고 엄마라는 보편의 정체성이 워낙 확고하게 자리잡으니 말이다.


나는 그러면서도 아빠에게 화가 나 있어. 아주 많이 화가 나.

어떤 일을 하든 내가 더 힘든 일을 하는 것 같아. 내가 낮에 가이드를 하고 집에 오면 인정을 받고 싶은데 왜냐면 가이드를 하고 집에 와서 엄마가 돼야 하니까.

또 내가 하루 종일 집에 있고 너희 아빠가 가이드를 하고 집에 오면 나는 또 인정을 받고 싶어.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있었고 산에 가서 일하거나 놀지 못했으니까.

마이카 버하르트, <이토록 완벽한 불균형> 中


하루종일 아기와 씨름하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를 반복하다보면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 남편이 야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원망스러운(?) 기분이 든다. 내가 지나치게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 그걸 좀 알아주면 좋겠다는 기분.


이 책의 원제목은 'More : Life on the Edge of Adventure and Motherhood'로, 모험하는 엄마로서의 벼랑 끝 삶에서 지금의 현실보다 더 많은 걸 원하는 내면의 욕구를 담고 있다. 나 또한 육아를 하면서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충만하기도 하지만 과연 이게 최선일까? 이게 다일까? 내 삶은 고작 이것 뿐인 걸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우선 직장이나 사회에서 채우던 인정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고, 혼자만의 싸움으로 임출육을 해내고 있는 지금의 모양새도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게 내맘대로 되면 좋겠지만 남편의 하루를 생각하면 또 짠하고, 그런데도 서운하고, 그런 마음들이 잔뜩 혼재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토록 완벽한 불균형>이라는 책 제목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원제를 이렇게 절묘하게 바꿔서 출간한 노지양 번역가에게 다시 한번 놀라움을 느꼈다. 완벽한 불균형의 세계에서 줄타기 하 나 자신에게 용기와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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