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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강훈 Sep 30. 2024

두만강에 노 젓는 뱃사공은 없었다

가수 강산에는 노래 ‘라구요’에서 아버지의 두만강을 슬프게 노래한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은 없지만 그 노래만은 잘 안다.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가 아닌, 수많은 실제 사연과 더 큰 아픔의 노래들이었다. TV에서 보이는 중국 국경 부근의 두만강은 한적하고 고요하기 짝이 없는 시골 농촌의 풍경이다. 북녘땅에는 그 흔한 사람마저 아예 보이질 않는다. 집은 있으나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다. 두만강은 그 고요함 뒤에 슬픔, 아픔, 두려움, 죽음, 시작, 희망, 간절함, 그리운 삶이 묻어 있다. 이 강을 건넜던 수많은 이들이 함께한 순간의 기억이다.     


북한을 육로로 벗어나려면 반드시 강을 건너야 한다. 그 강이 ‘두만강’과 ‘압록강’이다. 사는 곳이 두만강 근처면 두만강을 건너고 압록강이 더 가까우면 압록강을 건넌다고 한다. 한쪽이 경계가 허술하거나 강물이 얕아서가 아니다. 살고 있는 곳에서 최단 거리 이동으로 건널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다. 북한에는 이동제한이 있기에 먼 거리 이동하는 것은 매우 부담이 된다. 처음부터 무작정 탈북 결심을 하지는 않는다. 누가 나의 고향을 버리고 싶을까? 그 누가 가족을 버리고 싶을까? 굶어 죽어가는 가족을 위해 누군가는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장모님께서 북한에서 굶어 죽어가는 한 집의 실화를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다. 어느 날 밤 북한의 한 가정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놀라서 경악하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인 줄 알았는데 다섯 식구가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며칠은 굶은 상태로 보였다고 한다. 주인과 마주친 도둑은 놀라 도망치려 했지만, 집주인이 한마디 했다.

“집 안에 있는 물건 마음에 드는 것 있으면 다 가져가시오. 어차피 죽을 목숨이오.”

도둑은 되레 화를 냈다고 한다.

“여보시오, 죽긴 왜 죽소? 뭐라도 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소. 그렇게 누워만 있으면 누가 강냉이라도 준다 하오? 살아야 하오.” 오히려 호통을 치고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 도둑은 훔친 곡식과 감자를 그 집에 두고 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바로 믿지는 않았다. 설마, 설마 했지만 내 옆에 산증인이 있으니 바로 수긍하였다.       



장모님도 그렇게 남아 있는 딸들을 설득한 후 강을 넘게 되었다. 딸들은 강을 넘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몰랐다. 단지 ‘먹을 것을 구하러 간다. 그리고 배를 채우고 식량을 구하면 고향에 다시 돌아온다.’는 그 말이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당시 열여섯 살 아내는 엄마의 달콤한 말에 이끌려 철없이 길을 따라나선다. 중국에 장사하러 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중국과 맞닿은 국경에 도착했다. 두만강, 이 강만 넘으면 된다. 낮에는 경계가 삼엄하기 때문에 강태공도 볼 수가 없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곳이다. 밤에 쥐 죽은 듯 조용히 숨죽이며 도강을 시도한다. 발각되면 시체가 되어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차가운 물이다. 어른에게 가슴팍 높이라면 열여섯 아이에게는 목까지 오는 깊이였다. 그것도 얕은 물줄기를 찾은 경우에 그렇다. 겨울에는 꽁꽁 언 얼음장을 건너다 실족하여 떠내려 가거나 발각되어 경계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겪어 보지 않았지만 그다음은 상상하기도 싫다. 그들에게 두만강은 그만큼 목숨을 건 희망이었다. 장모님 가족은 무사히 하나둘 건넜다. 모두 중국 땅을 처음 밟아본 사람들이다. 중국에서부터는 브로커의 안내를 따를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공안에 넘겨져 북송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로커라고 해서 전부 믿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 현실 속에 이들은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게 된다. 단 1%의 희망이 있을지라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산세가 험한 산길을 몇 시간째 돌고 돌아 같은 길을 계속 반복하여 지나고 있다. 또 같은 곳을 지나고 있다. 누군가 말한다.


“어, 아까 지나왔던 길이잖소!”

“맞소, 지나온 길 같소.”

브로커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리고 알아듣기 힘든 표정을 짓는다.

어른들이 낙담하고 있는 순간 한쪽 편에는 좋다고 팔짝팔짝 뛰는 열여섯 살 소녀가 있었다.

“엄마, 이제 우리 집에 돌아가는 거야?” 너무 힘들어서 그랬는지 어렸던 아내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일행들은 의심한다. 브로커에게 항의해 보지만 묵묵부답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었다. 돈을 더 달라고 한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온 이들에게 돈을 더 요구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처음과 다르게 브로커들은 돌변하였다. 대가로 그들의 목숨을 요구하는 듯하다. 시집을 안 간 여자는 그들의 표적이 되어 중국의 한 가정에 비싼 값에 넘겨지기도 한다. 그들이 원하는 대가였다. 아내는 어린 미성년자여서 눈 밖에 났지만, 두 언니를 잃고 말았다. 장모님도 눈앞에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모두 북송되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브로커는 위로한답시고 한마디 건넨다.

“여보시오, 걱정하지 마시오. 지금보다 더 잘 먹고 잘 살 거요. 적어도 지금보다는.”

눈물을 훔칠 새도 없이 중국의 깊숙한 산을 넘고 또 넘어 어느 한적한 마을에 도착한다. 의도치 않은 아내의 탈북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엄마 나, 학교 가야 하는데.” 울먹이며 속에서 나오려는 말을 꾹꾹 참으면 엄마를 뒤따른다.

그녀는 속마음을 감추고 어느 중국 외곽의 깊은 산골에서 몸을 숨기며 살게 되었다. 엄마가 선택한 이 힘든 여정이 옳은 판단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엄마는 매일 밤 되새기면 딸에게 말한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거야.”

“지금은 힘든 것도 아니야, 적어도 배는 굶지 않잖아! 그렇지?”

그녀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길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었다.      


살면서 내가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지지만 선택하지 않은 일도 책임을 지는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얼음은 금이 가고 

갈라질 때

입술을 연다

최초의 입김으로 

찢어지는 신음을 낸다

박정희 「얼음강의 신음 - 아, 두만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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