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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강훈 Aug 13. 2024

불알, 죽이라우

장모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는 듯했다. 하지만 눈치 없이 그냥 가만히 있었다. 눈치라기보다 순간 이해를 못 한 상황이다.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장모님의 드센 목소리가 사실 무서웠다.

“불알, 죽이라우! 죽이라우!” 사위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 오죽 답답하셨을까? 하지만 사위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데 어쩌신다. 경상도 사투리도 만만치 않은데 장모님의 북한 말투는 전투적으로 들렸다. 그래서 가뜩이나 기가 죽었는데 불알까지 죽이라니? 남자라면 그 소중한 부위를 죽이는 것은 정체성을 잃는 것과 같은데 말이다. 나는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찬 거라곤 불알 두 쪽인데, 여보, 빨리 와줘 비뇨기과 가기 싫어.’ 속으로 이런 말을 해도 소용없다. 나중에는 “죽이라! 죽이라!” 짧게 말만 하셨다. 보다 못한 장모님은 높였던 언성을 낮추며 거실 전등과 부엌 전등불을 모두 끄고 계신다. 집안의 모든 불을 끄셨다. 훤한 대낮에 불을 다 켜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던 것이다. 일흔여섯, 북한 물을 많이 드신 노파는 화가 잔뜩 나셨고 전기요금 걱정에 노발대발이었다. 게다가 북쪽 말투는 억양이 세다. 나를 힐끔 보시면서 방에 들어가셨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되었다.


 불알은 전등, 형광등이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지금은 북에서도 잘 안 쓰는 말이라고 한다. 예전에 사용하던 북한말인데 전구를 불이 들어있는 알이라 해서 ‘불알’, 형광등은 ‘긴 불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연세 있으신 분들은 그 말이 툭툭 튀어나오신다며 이해하라고, 젊은 사람은 바꿀 수 있지만 노친은 쉽지 않다고 아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지난 몇 년 동안 함께 살면서 언어의 장벽은 거의 없었다. 일부러 말귀를 못 알아들은 척하지 않는다면 전혀 문제는 없었다. 가끔 북한말이 무의식 중에 툭툭 나오지만, 의미는 눈치로 알아듣곤 했다. 처음 듣는 말이면 당황스럽다.

“여보, 장바구니에 남새 좀 다 꺼내줄래요?”, “남새 좀 많이 먹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억이 있다. 냄새는 아닐 테고, 일단 먹는 거일 텐데 도무지 몰라 망설였다. 

장바구니 안을 보고 있는 남편이 답답했는지 “이거!” 하면서 야채를 모두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남새’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분명한 건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처럼 ‘남새’가 남의 새끼의 줄임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여기는 남새라는 말은 전혀 안 쓰나 봐?”, “응, 처음 들었어. 음, 여기서는 잘 안 쓰지.” 아내도 한국에 정착하면서 언어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표준어를  들으면 그나마 이해하지만 남한 사람이 북한말을 잘 못 이해하듯 그들도 사투리나 외래어는 어렵다고 한다. 


예를 들면, “내일 수제비 먹으러 가자.” 이 말을 듣고 아내는 “수제비가 어디예요?” 했다고 한다. 시장 한복판에서 수제비를 찾아 헤맸던 그녀다. 북한에서는 ‘수제비’라 부르지 않고 ‘뜨더국’이라고 부른다며 웃었던 일이 있다. 식당에서 정수기 옆에 ‘물은 셀프입니다.’, ‘와이파이 무료’라고 적힌 문구를 보고 “셀프 주세요.”, “와이파이 주세요.”라고 말한 아내의 고향 친구도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박장대소하고 웃었다. 하지만 웃을 일만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이들을 탓할 게 아니라 우리가 생활 속에 잘못된 표현과 외래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북한은 순우리말을 지키고 있다. 만약, 아내가 아이에게 도형을 가르칠 때 ‘이건 바른삼각형이야’라고 말한다면 내가 ‘아니야 정삼각형이야’라고 말해야 할까? 아내는 바른삼각형인데 나는 늘 정삼각형이다.     



남새: 밭에서 기르는 농작물. 주로 그 잎이나 줄기, 나물, 야채, 채소.

바른삼각형: 정삼각형의 북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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