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기가 발동한 어느 날이었다. 진주에는 해마다 시월이면 개천예술제와 남강유등축제가 열린다. 길거리마다 축제 준비로 분주했다. 홍보 현수막과 광고탑이 보이고 남강에 띄워질 각양각색의 화려한 유등들도 보였다. 그리고 한 개의 현수막이 내 눈에 확 들어왔다. ‘남가람 가요제 참가자 모집’이라는 글씨가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다. 휴대전화로 검색하고 상세 모집 내용을 확인했다. ‘참가 자격은 남·여 누구나 가능, 곡목은 자유곡(대중가요에 한함), 접수는 9월 16일까지’ 이 글을 보자마자 인터넷으로 고민도 없이 신청했다. 아내의 이름으로…. 물론 단돈 만 원의 참가비가 필요했다. 노래 한 곡에 만 원은 좀 비싸기는 하지만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도 않지만 온다고 하더라도 쉽게 신청할 수 없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좋은 경험이라 생각했다. 아내에게는 가요제 참가 신청 사실을 숨겼다. 아내는 우리나라 대중가요 중에서 특히 트로트를 좋아했다. 노래연습장에 같이 갈 때면 항상 트로트를 부르곤 했다. 팔불출 소리를 들을지 모르지만, 아내의 노래 실력은 기본 이상이다. 아내가 노래를 부르면 지인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럴 때면 많이 수줍어하며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가사를 곱씹어 부를 때는 한이 많이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단정할 순 없지만 TV 프로그램에 나온 탈북 여성들도 노래 실력이 좋았다. 그런 장면들을 생각해서 북한 사람은 노래를 다 잘하나 보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며칠 동안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주최 측의 연락을 받았는지, 나를 추궁한다.
“뭐! 남가람 가요제? 불어라! 오빠제?”
접수 사흘 후 아내에게 문자가 전송된 것이다. 정상적인 신청 확인을 위해 신청자 이름과 나이를 제대로 확인하고 곡명을 보내달라는 문자였다. 물론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은 남편밖에 없을 것이므로 쉽게 들통났다. 너무 빨리 밝혀져 못내 아쉬웠지만 빠르게 인정하며 사실대로 말했다.
“나의 스프라이즈 어때?”
“누가 이런 스프라이즈 해 달랬나? 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주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냥 아내의 눈치만 보고 넘겼다. “싫으면 안 가도 돼.”
며칠 후 곡명을 정하고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장윤정의 ‘올래’를 연습하더니, 다음 날은 윤수현의 ‘꽃길’을 부르고 있었다.
가사를 들으라는 듯이 내 앞에서 매일 연습한다. 가사가 의미심장하다. 모르고 살아온 북한 생활이 너무나 힘들어 알고는 다시 못 간다는 말인지? 아무것도 몰라 이 남편을 믿고 사랑을 선택했는데 내가 너무 아프게 했나? 중의적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내가 괜히 찔려서인지 아내의 심정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된다. 그냥 가사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또 해석하려니 헷갈린다. 생각이 너무 많다. 그냥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다. 예선 당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날은 스스로 운전기사를 자청하여 아내와 동행하기로 했다. 예선까지만 해도 둘은 앞으로 닥칠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남편의 장난기로 가요제에 신청했고, 노래연습장에서 한 곡 부르듯이 가볍게 부르고 내려오면 된다는 식으로 쿨하게 받아준 아내였다.
1차 심사 당일 아침이다. 긴장한 모습으로 거울 앞에서 이 옷 저 옷 고르는 모습을 보니 귀엽기만 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일찍 예선 장소에 도착했다. 접수대에서 실명 확인을 하고 심사장에 들어가 앉았다. 순서에 따라 참가번호를 부르면 한 명씩 무대에 올라 반주와 함께 한 곡 부르고 내려오면 끝이다. 생각보다 쉬웠다. 물론 참가자가 아닌 관중 입장의 생각이다. 잠시 후,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참가 확인을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강당은 이내 사람들로 꽉 찼다. 물을 자꾸 마시는 아내를 보니 많이 긴장한 듯했다. 노래 부르기 전 이미 생수 두 병을 마신 상태다.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 싶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최선을 다하길 바라며 응원했다.
경연 시작을 알리는 경음악과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사회자가 진행에 앞서 많은 참가에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심사위원 다섯 분을 소개했다. 드디어 시작이다. 참가자는 예선에서만 300명이 넘었다. 윗지방 참가자들은 대전에서 예선 심사를 한다고 했다. 순간, 깜짝 놀랐다. 가요제 이름만 보고 지역축제 행사의 작은 노래자랑이라 생각했고 접수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나를 째려보더니 허벅지를 꼬집는다. 수많은 참가자 속에서 덜덜 떨면서 기다리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아내의 참가번호 호명이 되어 무대 앞에 올라섰다. 반주가 나오자 떨리는 목소리로 1절까지 해냈다. 중간에 반주가 끊기거나 땡은 없었다. 비록 예선 탈락이었지만 본인 순서에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도전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역시 나보다 한 수 위다. “미안, 당신이 매일 연습하며 진짜 나갈 줄은 몰랐어.”
알고 보니, 이 대회는 우승 상금이 500만 원에다가 가수 인증서를 주는 전국 규모의 대회였다. 동네 노래자랑인 줄 알고 신청한 남편의 짓궂은 장난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고 싶고, 같이 먹고 싶고, 뭐라도 경험을 시켜주고 싶은 마음 나만 그럴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좋은 것을 공유하고 기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은 같다. 나도 그녀에게 일상에서 작은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수고했어. 당신은 이제 경력자야! 이제 꽃길만 걷게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