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만남
“친구야 ~ 드디어 너도 장가를 가네”
“신부가 곱네요”
“축하드립니다. 이제 한시름 놓으셨네요”
“훈이 축하한다. 오늘 젤 멋지다.”
수 없이 축하의 말과 인사들이 오간다. 가족들과 친지들 속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그녀의 속도 모른 채 말이다. 그녀는 결혼 날짜를 잡은 날부터 초조해했었다. 남편인 나는 그런 신부의 심정을 모를 리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뽐내야 하고 여느 신부처럼 이날의 주인공 되어 주목받아야 할 신부가 이토록 초조하고 걱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애석하게도 부모님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이다. 이런 속사정을 알고 있는 나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신부 측 혼주로 미리 부탁했었다. 고맙게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시고 혼주의 역할을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두 분에게 너무나 고맙게 생각한다.
아내의 고향 함경북도 청진. 16세 나이에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살다가 이 땅을 밟은 지는 십여 년이 지났다. 이제는 이곳이 제2의 고향인 것처럼 잘 살아오고 있었고, 그 와중에 지인의 소개로 나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동행하게 되었다. 넷째 딸인 그녀 혼자 어머니와 같이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사랑하는 언니들은 이국땅을 밟는 과정에서 뿔뿔이 헤어졌다고 한다. 구구절절 사연은 많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는 아끼게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잃어버린 딸들을 찾기 위해 한국 땅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다시 가셨다. 죽기 전에 언젠가 만나리라는 희망 고문만 남긴 채로 막내딸을 두고 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가 나에게 가족 이야기를 아꼈던 이유였다. 예비 사위인 나도 결혼하기 전 연애 기간에 전화 통화로만 인사를 나눴었다. 결혼 전에는 꼭 뵙고 결혼 승낙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녀의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함께 갔었다. 나의 장모님 되실 분이니 마땅히 사위로서 도리라고 생각했다. 장모님을 마주하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을 느꼈다. 그냥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 기분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오만가지 감정들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검게 탄 얼굴에 이마엔 주름이 셋,
짧은 단발머리에 꾸미지 않은 수수한 옷차림,
왜소하지 않은 체격의 약간의 굽은 허리.
내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의 세월이 그만큼 편치 않았음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 세월이리라. 잃어버린 딸 셋을 찾으면 이마에 저 큰 주름들은 다시 펴지겠지. 장모님께 큰절을 올리고 결혼 승낙을 받았다. 보시자마자 나에게 하신 한마디 하셨다.
“고 서방~ 우리 딸 잘 부탁하네.”
“근데 난 결혼식은 못 가. 그냥 못가·····.”
"네... 알겠습니다. 장모님 제가 딸 잘 보살피고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그리고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자주 찾아뵙겠다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장모님 기분 좋으시도록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내뱉고 말았다. 명절이 오면 일 년에 한두 번은 찾아뵐 수 있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기 때문이다. 장모님과 아쉬움 가득한 시간을 뒤로하고 이별해야 했다. 돌아올 때 가져갈 짐은 배가 되었다. 장모님께서 딸과 사위에 대해 미안함인지 고마움인지 모르지만, 바리바리 싸주신 많은 선물이 마음을 더 찡하게 하였다. 거기에다 마음의 짐까지 덤으로 주시니 어깨가 더욱 무거웠다. 내가 기억하는 장모님의 첫 만남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일사천리로 결혼 준비하였다. 빠르면 빠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연애 시작부터 100일 만에 덜컥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결혼 날짜를 미루자고 작은 언쟁은 있었지만 내가 굽히지 않았다. 모든 준비는 내가 하기로 하고 그녀에게는 마음만 챙기고 따라만 와달라고 부탁하였다. 신부의 절대적인 영역을 제외하고 식장부터 신혼여행까지 내가 직접 챙기기로 하여서인지 수월하게 준비가 되었고 큰 다툼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고 본다. 아뿔싸! 혼수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 역시나 예비부부가 거쳐 가는 혼수 문제가 우리 커플에게도 다가왔다.
“오빠? 혼수는 어떻게 해?”
“그냥 몸만 오면 되지! 숟가락만 가지고 온나!”
“그래도 남들처럼 할래”
“그럼 과하지 않게 알아서 우리 살집에 필요한 것만 해. 알았쩨?”
“결정하기 전에 나한테 보여줘야 해?”
오고 간 말들은 온데간데없고 여자의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욕심 아닌 욕심, 시댁의 밀려오는 눈치, 남들의 작은 시선들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을까? 그녀는 제대로 준비하는 눈치였다. 냉장고, 식탁, 소파는 금액을 아끼고 싶어도 내가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여자만의 영역이라나? 살 때 제대로 사야 된다나? 분명 또 주변에 결혼한 언니에게 여기저기 물어봤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부담을 준 것 같아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빠, 괜찮아. 한 번뿐인 결혼식이고 혼수잖아.”
“언제 또 이런 것 준비해 보겠어? 이번에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둬”
“북한에서도 결혼하면 혼수 준비하나?”
“응, 당연하지”
“걱정 마, 한국식으로 신상으로 준비할 테니까”
“어휴, 못 말린다. 진짜, 무리하지는 마”
난 그래도 부모님께 보내는 값 비싼 예단이나 이런 것은 뺐으면 하는 심경이었다. 환불받으러 당장 가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싸움으로 번질까 봐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웅다웅하며 준비하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결국 이렇게 결혼식 당일이 오는구나. 난 설레고 기쁘고 행복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축하해 주는 자리라 기분이 더 좋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지인들이 나타나니 나만 행복해하고 있었다. 한편 신부인 그녀는 어땠을까? 사실 결혼 이야기 나왔을 때 그녀는 장모님이 못 오시니 혼주석이 걱정되었고 찾아올 우인도 없어서 결혼식을 생략하자고 말했었다. 옥신각신하다 아내의 배려로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신부 측 혼주석에는 지인께 부탁을 드렸고 우인은 나의 지인으로 자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니 낯설고, 무섭고, 긴장과 걱정이 난무한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보는 것 같아 두려움도 느꼈을 것이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기 위해 신랑·신부 동시 입장을 하기로 했었다. 사회자의 입장 소리가 나기 1분 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눈치 없는 나는 한마디 물어보게 된다.
“왜?”
그녀가 나에게 던진 외로운 한마디.
“아니, 그냥.”
그리고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눈빛으로 말을 하였다.
“내만 믿어라!”
사회자의 목소리에 문이 열리고 모든 조명과 하객들의 시선이 우리 둘을 향하고 있다. 떨린다. 나도 떨린다. 처음이니까. 그녀가 나에게 던진 “아니, 그냥.”이라는 한 마디가 그때 그녀의 기분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렇게 결혼 행진곡은 울려 퍼지고 나의 결혼 생활 1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