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유치원에 가고 나면 시간은 느리게 움직인다. 분주했던 몸짓들이 사라진 나의 걸음도 같이 느려진다. 오월의 오전은 눈부시다. 기분 좋은 바람이 콧속을 시원케 한다. 봄의 향기가 난다. 눈을 들어보니 연둣빛이 거리에 번지고 있었다. 봄은 이렇게나 매혹적이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옮긴다. 오랜만에 산책이다.
봄을 맞으며 걷는 오늘은 매일 오는 오늘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는 평일이었고, 아이들이 유치원에 갈 수 있는 몸상태였다. 비도 오지 않았고, 걷기에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였다. 햇살은 반짝거렸다. 나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없었고, 아무런 약속도 없었다. 전화도 오지 않았고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마치 오늘 이 시간에 여기에 있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준비된 것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이 나를 이끌어 봄 한가운데에 있게 했다. 이것은 더 이상 일상적이고 평범한 산책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준비된 자들에게 주어진 거대한 자연의 초대장일지도! 가슴을 펴고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싣는다. 나는 지금 현실의 세계 너머 어디쯤, 생명의 순환들로 바쁘게 움직이는 계절의 입구로 들어온 것 같다.
모든 것을 깨우는 봄의 숨소리가 들린다. 나무는 이제 막 손을 뻗기 시작했다. 연분홍과 노랑이 여기저기를 물들이고 낮게 핀 들꽃과 아무렇게 난 작은 풀들은 생명의 생생함을 자랑한다. 작은 것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바쁘다. 봄은 서둘러 생명이 출렁이는 짙고 강한 초록이 가득한 여름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모든 것을 녹일 듯한 열기에 숨이 막히면서도 모든 것을 정복시킬 것처럼 강하게 서 있는 초록이 무성한 나무를 보면서 아직 살아 있다는 위로를 얻는다. 온 산을 넘실거리며 무섭게 뻗어나가는 초록의 웅장함에서 세상을 금방이라도 덮어버릴 것 같은 강한 생명력을 느낀다. 때때로 여름의 이런 흔들리지 않는 무게감과 위엄이 넘치는 모습에 나는 압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꺾일 것 같지 않은 강인한 여름도 기꺼이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 맡긴다. 시간은 나무 위에 짙었던 초록을 거두고 가을을 입힐 것이다.
그때 나무들은 사라져 가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할 것이다. 저녁 시간 황금빛 하늘 아래 벅차오르는 붉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토해내며 창대한 낙하를 향해가는 가을의 필사적인 발걸음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남기고 장엄한 이별을 고하는 가을을 기억할 것이다. 겨울은 초라하게도 슬프게도 오지 않는다. 마지막을 아는 자가 베푸는 여유와 겸손은 온 세상을 순수하게 덮는다. 생기를 잃은 나뭇가지에도 겨울의 따스함은 내려앉을 것이다. 그리고 나무에 내려앉은 겨울마다 봄을 말할 것이다. 겨울의 인사는 끝인사가 아니다. 그것은 희망이자 시작을 알리는 봄 인사이다. 겨울은 추위를 견디는 인내를 가르쳐주고 봄을 기다리는 법을 알려준다. 그래서 겨울은 어느 계절보다 반짝이는 것이다.
자연은 시간과 조화를 이루며 계절을 만들어낸다. 계절은 주어진 역할에 한 번도 소홀한 적이 없다. 자신의 현재를 빗나간 적도 없다. 자신을 내세울 때를 알고 물러날 때를 안다. 모질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꽃은 피고, 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꽃잎은 떨어진다. 자신의 색을 고집하지 않는 나무도 시간이 흘러가면 기꺼이 색을 갈아입고 결국엔 겨울을 맞이한다. 한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고 자신의 적절한 때를 아는 자연의 모든 순간은 존경스럽다.
나는 오늘 이 봄을 시작으로 모든 계절의 순간들을 만날 것이다. 연두가 번지며 생명이 시작되는 봄을 지나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강한 생명력으로 무성히 몰려오는 초록의 여름을 만날 것이다. 찬란한 아름다움을 기꺼이 내려놓는 가을을 담을 것이고, 쓸쓸하지 않게 안녕을 말하는 겨울을 배울 것이다. 나는 모든 계절을 볼 것이다. 그리고 계절처럼 살 것이다.
비장하게, 이 봄을 걸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