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 라면

by 아무

오후 1시. 점심시간이었다. 개고 있던 빨래를 마저 정리하고는 방을 나섰다. 거실은 오랜만에 제 모습을 갖추고 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거실은 오랜만에 찾아온 이 고요한 휴식을 방해 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작은 냄비를 꺼내 라면 한 개를 끓일 물을 부어 가스렌지에 올려놓았다. 타다다다닥. 그래, 가스 불을 켤 때 이런 소리가 났었지. 오랜만이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라면을 반으로 뚝 자르고 스프를 한 쪽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할 일이 없었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만 돌아갈 뿐 집안은 조용했다. 공간은 익숙한데 공기가 달랐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인사를 건네는 느낌.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은 기분. 좋았다. 집도 나도 만족스런 오후 1시를 보내고 있었다.


코로나의 거센 여파로 한동안 아이들은 유치원에 가지 못했었다. 아이들의 놀이 소리와 다툼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고, 거실은 아이들에게 점령당했다. 두 아이는 쉴 새 없이 놀고 온 집안을 휩쓸고 다니며 어질러 놓았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집안도 귀가 먹먹해질 것 같은 아이들의 소음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밥이었다. 노는데 정신이 사로잡힌 아이들에게 밥은 안중에도 없었다. 삼 시 세끼 밥을 차려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인데, 밥 먹자는 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야 아이들은 식탁에 앉았다. 앉고 나서도 두 아이는 하던 놀이를 이어가기도 하고 조잘대며 웃고 떠드느라 밥은 늘 뒷전이었다. 달래고, 어르고, 협박하고, 싫은 소리를 해가며 밥을 먹이는 일은 육체노동에 정신노동이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점심에 먹을 것을 생각하고,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 메뉴를 결정하며 내일 먹을 게 있는지 냉장고를 확인해야 하는 일상이 고되고 바쁘게 반복되고 있었다. 알약 하나로 식사를 대신할 시대는 언제쯤 올 것인가. 우스갯소리로 하던 말에 진심이 섞이기 시작했을 즈음, 아이들이 다시 유치원에 가기 시작했다.


물 끓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나는 라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 몹시도 간절했다. 더군다나 라면은 아이들이 있을 때는 먹을 수 없는 금기의 음식이었다. 그래서 라면이어야 했다. 얼큰하고 건강에도 좋지 않은 라면이라니! 짜릿한 일탈을 즐기듯 냄비에 스프를 탈탈 털어 넣었다. 정성도 수고도 필요 없었다. 냉장고에서 김치 하나만 꺼내 단출한 한 끼를 마련했다. 밥을 먹으면서 진을 빼지 않아도 되고 별 다른 반찬도 필요 없는 식사를 하게 되다니... 라면을 앞에 두고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호로록 호로록 한 젓가락씩 입에 물 때마다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라면을 먹었다기 보다 기분을 먹은 것 같다. 나의 속도에 맞춘 느긋하고 나른한 한 끼,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고 혼자였지만 풍성했던 선물 같은 한 끼였다. 호사스런 한 끼를 만끽하고 나니 게으름이 몰려온다. 비워진 그릇들을 싱크대에 아무렇게나 담아두고 뒹굴뒹굴 한껏 여유를 부린다. 그래도 된다. 오랜만에 혼자, 였다.



*<나의 첫 에세이 출판수업-두번재 이야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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