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밥솥에 우리를 맡겨두었다.

by 아무

밥솥에서 밥이 다 되었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밥솥 뚜껑을 여니 하얗고 뽀얀 연기가 모락모락 위로 올라갔다. 주걱으로 밥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유난히 반짝이는 하얀 밥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이때 먹는 밥이 제일 맛있지. 김치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그릇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갓 지은 밥이다. 매일 겪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가끔가다 밥솥을 열었을 때 한꺼번에 올라오는 그 하얀 김은 나를 익숙해지지 않는 어릴 적 엄마의 밥솥으로 이끌고 가기도 한다.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은 내 어릴 적 밥의 기억으로 말이다.


나에게 밥은 따뜻한 음식이 아니다.


내 어릴 적 아침이면 밥솥에 흰쌀밥이 가득했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 넷을 키워야 했던 엄마는 아침에 밥솥 가득 밥을 해 안쳤다. 엄마는 부랴부랴 자식들에게 아침을 챙겨 주고 우리보다 일찍 출근을 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는 밥솥에 가득 담긴 밥을 먹고 숙제를 했고, 밥을 먹고 놀았다. 밥을 먹고 어두워지는 밖을 쳐다보며 엄마를 기다렸다. 사 남매가 먹은 밥그릇은 저녁이 되면 설거지통에 한가득 쌓였다. 해가 저물어 엄마가 오면 엄마는 늦은 저녁을 먹고는 설거지통에 가득 담긴 설거지를 씩씩하게 하곤 했다.


엄마 없는 밥상은 익숙했지만 엄마가 없는 쓸쓸함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밥솥을 열 때마다 한 번씩 나를 어릴 적 밥상으로 소환하게 하는 것도 나 스스로 밥솥을 열었을 때 나는 그 밥 냄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침에는 분명 뽀얗고 윤이 나는 흰쌀밥이었는데 저녁이 되면 어느 정도 마르고 누렇게 변해버린 그 밥을 뜨면서 나는 엄마가 집에 없는 게 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시절 밥은 적어도 나에겐 엄마의 부재와 애정의 결핍으로 기억된다. 어릴 적 밥은 나에게 가난을 가르쳐주었고, 엄마 없는 생활에 불평할 수 없음을 배우게 했다.


녹록지 않은 시절을 견디는 동안 엄마는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매일 아침 쌀을 씻으며 엄마 없이 보낼 자식들의 하루를 엄마는 밥솥에 맡기고 있었다. 그 밥이 자식들을 자라게 했고, 공부도 하게 했고, 놀게도 했다. 우리는 엄마 대신으로 밥솥의 온기를 의지해 자랐다. 나는 그런 밥을, 먹어도 허기진 밥을 먹으며 자랐다. 가난하고 바쁜 엄마에게 밥솥은 자식들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침이면 밥솥 그득하게 밥을 해 놓고 갔어도 퇴근하고 돌아오면 바닥을 보이는 밥솥을 보며 엄마는 가슴이 철렁했으리라. 그래서 우리가 크는 동안 엄마의 손도 같이 커져 갔다. 많은 양의 밥을 하는 데 익숙해진 엄마의 손은 자식들이 다 자라 하나, 둘 집을 떠났을 때도 쉽게 줄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자식들이 비워진 자리에 밥솥의 밥이 자식들 대신 남겨졌다. 엄마가 출근했을 때 엄마 대신 밥이 우리에게 남았던 것처럼. 저녁이 지나도 밥솥에 밥이 남아 있게 되었을 때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일은 밥을 적게 해야지, 적게 해야지... 엄마의 젊은 날은 부족하지 않게 밥을 채워야 했던 시간들이었고, 이제는 밥솥의 밥을 없애는 시간들이 되어버렸다. 어릴 땐 몰랐다. 엄마의 나이를 지나고 내가 엄마라는 이름을 갖고 나니 엄마가 겪었을 세월이 조금씩 손끝에 저릿하게 만져는 것 같다. 자식들 입에 삼시세끼 밥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엄마는 일과 밥으로 당신의 젊은 날을 채웠다. 밥이 나에게 따뜻하지 않은 이유이다.


흰쌀밥의 뜨거운 열기가 축축하게 눈가에 와닿는 것 같다. 엄마의 부재가 싫었던 어린 날의 슬픔과 자식을 키우기 위해 모질고 거센 삶의 파도를 감당해야 했던 엄마의 고됨과 외로움이 뭉뚱그려져 밥 냄새에 배어있다. 당신의 딸이 예전의 당신처럼 밥을 짓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엄마에게 위로와 안심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것들을 자식들은 이제 몰라도 괜찮다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의 피나는 젊음이 보상받을 수 있을까?


지금도 엄마는 우리가 가면 밥을 하시고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상을 차리신다. 엄마에게 밥은 무엇일까? 엄마는 밥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식들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니까 엄마에게 밥은 자식을 향한 최선이고 모성이다. 내가 어렸을 적 엄마는 밥솥에 우리를 맡기시며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계셨다. 우리는 따뜻한 밥은 아니지만 최선의 밥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 나에게 밥은 엄마의 최선의 흔적이고 모성의 아픈 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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