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의 숫자를 셀 수 있어요.

우울의 수를 세다 침잠합니다.

by 아무

백옥같이 고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얗고 맑은 피부를 보며 모두들 감탄의 말을 건네던 빛나던 순간이, 나에게도 있었습니다. 이런 피부는 타고나야 한다며 모두들 부러워했었죠.

하늘이 내려준 타고난 고운 피부는 시간이 가도 계속될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지나친 교만이었다는 것을 출산을 하고 십 년이 지난 후 알았습니다.


그 십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쌍둥이를 낳고 보니 세수가 뭔가요, 아침저녁도 사라진 날들의 연속에서 세수를 해야 하는 시간도 아니 세수를 기억하는 것조차도 잊어버렸습니다. 밖에 나갈 때도 하나로 질끈 동여맨 머리에 스킨로션만 대충 바르고 다녔죠. 선크림 한 통을 몇 년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때는 피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죠.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외모에 관심이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아이들을 돌보며 사는 게 전부였고, 그런 일상이 계속 이어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학교에 갔습니다. 스스로 밥도 잘 먹고, 목욕도 하고, 옷도 혼자 잘 입게 되었죠. 그래서 나는 거울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세요?

낯선 사람이 거기서 나를 보고 있더군요. 이런 생경스러움이라니.... 누구세요? 나는 어디 가고 당신이 거기 있는 건데요?


그 곱고 하얗던 피부에 폭격을 맞은 것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어떤 작전 세력이 내 얼굴에 앙심을 품지 않고서야 피부가 이렇게 초토화될 수 있는 건가요?


내 우울의 근원, 모공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우울을 세어봅니다. 코와 볼, 이마까지 점령한 작전 세력들은 나를 아래로, 아래로 잡아 내립니다. 피부에 생긴 모공의 개수만큼 정확히 내 마음에도 구멍이 생겼습니다. 그 구멍 사이로 우울과 침울과 애통의 무거운 공기가 한숨이 되어 빠져나갑니다.


그냥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늘어나는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쓸쓸한데, 모공까지 숫자를 더합니다. 통장 잔고를 제외하고는 나에게 속한 모든 숫자가 늘어납니다.


아이를 낳았을 뿐입니다. 육아로 정신이 없었을 뿐입니다. 억울한 마음이 자꾸만 솟구치는 건, 아이처럼 울어버리고 싶은 건 너무 미성숙한 마음일까요?

평범한 가정주부가 감히 피부과는 꿈도 못 꾸고 모든 화장품을 검색할 때마다 '모공관리', '모공축소'를 추가해 봅니다. 비포, 애프터를 비교해 놓은 화장품들을 들여다보며 희망을 구매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애프터는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단 말입니까?


매일매일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우울의 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우울을 축소시킬 수 있을까요? 우울을 체념하고 지금 모습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요?


돌보지 못한 마음엔 상처가 남듯이, 돌보지 못한 피부엔 모공이 남습니다. 엄마가 되어 바빴고, 시간을 흘러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은 쉽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밑으로, 밑으로 점점 가라앉는 기분은 쉽게 괜찮아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많은 우울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현실임을 인정하고 지금의 나를 받아들여야겠지요. 백옥 같던 나를 잊고, 새로운 나에게 익숙해지며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해줘야겠지요. 아줌마가 된 내 얼굴을 누가 그리 자세히 본다고, 적당히 가리고 이제라도 우울의 수치를 늘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살아야겠지요.


있을 때 지켜야 한다는 말을 잃고 나서야 절감합니다. 나에게 미안합니다. 이제는 우울을 세는 것을 멈추고, 거울을 조금 멀리서 보며 웃어봐야겠습니다. 모공이 있어도 예쁘다고 말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꽉 막혀버리면 좋을 것 같긴 합니다. 그 옛날의 나로 돌아가진 못하더라도 모공 없는 곳에서 우울의 허물을 벗고 솟구치는 홀가분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은 꿈은 쉬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모공...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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