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아, 나의 잠을 잠가줘

잠은 피곤 속에 파묻혀있어.

by 아무

요정아,

그런 날이 있어.

몸이 아픈데 하루 종일 너무 바쁜 날말이야.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어.


아침부터 등에 곰이 한 마리 업혀있고

머리에는 새가 집을 지었었지.

나는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백두산을 등반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생각해 봐 곰을 업고, 머리에는 새집을 이고

백두산을 올라가는 것이 어떤 걸지 말이야.


아침 바쁜 시간을 보내고

오전에는 좀 쉬어야지 생각했지.

하지만 일은 한꺼번에 몰아서 오더라고.

나는 부지런히 씻고 나갈 준비를 해야 했어.

종종걸음으로 일을 보고 시간 맞춰 이동하고

머리 위에서 새가 짹짹 울고

등 뒤에서 곰이 울부짖기 시작했어.

백두산 정상을 내려와서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기분은 상당히 불쾌하더라.


그래도 오후에는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왜 이 와중에 배가 고픈 거야?

하루쯤 굶어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번엔 눈 위에 배고픈 하이에나 한 마리가

어슬렁 거리기 시작했지.

휴, 정말 본능에 충실한 이 몸이 얼마나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는지 몰라.


요정아,

사람이 최악이라고 느껴질 때가 언제인지 알아?

머리에는 새집이 있고,

등에는 곰이 한 마리 있고,

백두산을 한번 등산하고,

장거리를 뛰고 와서

배고픈 하이에나를 겨우 달래줬는데

싱크대 안에 설거지가 넘쳐나는 거야.

아침부터 그릇들은 싱크대 안에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하나 만들어놓았더라고.


새들이 짹짹 거리는 통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설거지가

눈앞에 짠하고 나타난 거야.

나는 싱크대를 불법으로 점거한 설거지들을 소탕해야만 했지.


요정아,

사람의 한계는 어디까지인 걸까?

이쯤 되면 알아서 쓰러져줘야 할 것 같지 않아?

근데 버티더라.

칭찬은 사양할게.

이럴 땐 그냥 파묻혀버릴 만큼 나약한 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저녁 약속이 두 개나 잡혀있는 날이었지 뭐야.

취소도 할 수 없는 거였어.

결국 나는 새집이 흩트려놓은 머리를 빗고,

곰을 가리기 위한 옷을 입고

하이에나의 흔적을 싹싹 지우고는 열심히 차를 몰았어. 백두산을 등반하고

장거리 달리기를 마치고

설거지 마을 소탕작전을 수행하고 말이야.


거북이가 시계 위를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더라고.

머리 위에 집을 지은 새는 관자놀이를 콕콕 쪼기 시작했어.

등 위에 곰은 징징거리고 있었지.

나는 거북이를 응원하기 시작했어.

아니 사정하기 시작했지.

조금만 더 빨리, 거북아 힘을 내


요정아,

나는 흐물거리며 여기에 있어.

새는 관자놀이를 쪼다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곰은 등에서 흘러내려 다리에 매달려있지.

거북이가 나의 사정을 들은 건지,

아니면 이제 하루가 닫히는 건지

그런 건 모르겠고,


요정아,

이제 내 잠 좀 찾아줘.

하루 종일 너무 바빠서 잠을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어.

흐물거리는 몸으로 꿈을 찾을 힘이 없어.


나의 잠 좀 꺼내줘.

나의 잠을 잠가줘. 꼭꼭.

너의 황금 열쇠로 잠을 잠그고

멀리멀리 도망가 줘.


나는 아주 길고 아득한 잠이 필요해.

피곤 속에 묻혀버린 잠을 찾아 내 눈에 넣고,

잠을 꼭꼭 잠가줘.

아무도 나의 잠을 깨우지 못하게

누구도 이 잠을 찾지 못하게

요정의 열쇠로 꼭꼭 잠그고

멀리멀리 도망가줘.


요정아,

밤이 지나도 아침이 와도

아무도 너의 열쇠를 찾지 못하게 해야 해.

숲 속의 잠자는 공주보다 더 깊은 잠으로

나를 꼭꼭 잠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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