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온미라클 Jun 22. 2023

새로운 문,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시간이 약이다.


  난 웬만큼 친해지지 않으면 몇 시간 동안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극 ISTJ다. 그런 내가 센터장으로 기관을 이끌어 가야 한다니 하늘이 노래지고 천지가 진동할 일이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끝까지 버티지 못한 게 후회막급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내가 찍은 발등인 것을…


  그러고 보면, 자발적으로 남 앞에 나서는 건 죽도록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학급 실장으로 학교 임원으로 불려 다닌 일이 꽤 많다. 어찌어찌하다 보면 좋은 결과를 거두기도 했으니 내 안에, 내가 모르는 피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엔 그때완 달라도 너무 다르다. 친구들과 시험공부하고, 반을 이끄는 소꿉장난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근 1시간이 내근 8시간과 맞먹을 정도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나다.  잘 해낼 수 있을지 땅으로 꺼져가는 한숨을 어찌할 수가 없다.



 밤을 꼴딱 새우며 사업계획서를 쓰고, 평가 보고서를 쓰면서도 끄떡없던 심장이 외근을 나갈라치면 방망이질부터 쳐대던 내가 아니던가? 도무지 내 옷이 아닌 남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일렁이며 솟구치는 불편한 감정에 때려치우고 싶은 맘이 부지기수로 들었다. 하지만, 서푼도 안 되는 자존심과 센터장이 됐다며 좋아하던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도저히 못하겠다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거기다, 이것저것 재며 징징거리기엔 쏠려있는 눈과 귀가 너무 많았다. 두렵고 떨리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숱한 고비를 넘기며 얻은 맷집과 깡다구를 믿고 버텨야 했다.


  '시간이 약'이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시간이 흘러가자 조금씩 안정되고 모양새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모질지 못한 천성이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조직과 잘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자랑질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잘 넘겨낸 내가 대견하고 신기하기만 하다. 실무 총괄과 센터장으로 지낸 8년 동안 센터 운영평가에서 '7년 연속 A등급'을 맞았으니 평타를 넘어 홈런도 이런 홈런이 없다. 부족한 센터장과 함께 고생하며 일궈낸 직원들 덕분에 분에 넘치는 훈장을 받은 것이다. 모두에게 무한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사실,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하나 없는 데다 음주 가무까지 젬병인 나는 센터장 채용공고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극내성적인 성격답게 안살림을 총괄하는 부장으로 오래오래 근무하는 게 바람이라면 바람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센터장이 출근을 하지 않았다. 새 식구를 맞을 설렘과 긴장으로 분주하던 사무실이 순간 당혹감과 황당함으로 혼란해졌다. 부랴부랴 사태 파악을 해보니 운영주체에서 채용한 센터장을 지자체에서 불승인했단다.


  직감적으로 압박이 느껴졌다. 피할 수 없는 거센 파도 앞에 떠있는 조각배 같은 심정으로 센터장 대행 업무를 맡았다. 입사 후, 2번의 센터장 채용 때마다 '내부 적격자'로 거론되는 걸 경험이 부족하다, 능력이 안된다며 피하고 피하던 자리였다. 그런데, 이번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 새롭게 난 채용공고에 직원들까지 압박하고 나섰다. 모른 척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그러지 못하는 갈등 속을 갈팡질팡하다 마감 5전에 서류 접수를 했다.



내 인생의 새로운 문은 그렇게 열렸다.






이전 11화 ‘인생 직업’의 둥지를 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