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그리고 다시 시작
드디어, 대학원의 석사과정을 모두 마치고 논문만 쓰면 되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쏟아지는 업무에 도저히 짬이 나질 않았다. 결국, 한 학기를 손도 못 대고 보냈다. 학위 취득 후 사회복지시설을 거쳐, 직접 운영해 보고 싶은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은 조바심에 온몸의 세포들이 안절부절못했다. 커져가는 불안과 기왕이면 잘 쓰고 싶은 욕심에 퇴사를 결심했다. 많은 배려를 해준 직장을 나의 필요에 의해 무 자르듯 나오는 것 같아 너무 죄송했다. 하지만, 예의를 차릴 겨를이 없었다.
퇴사 후, 2년 동안 치열하게 달려온 삶을 잠시 내려놓고 있는데, 한 고등학교의 인턴교사 제의가 들어왔다. 논문을 써야 한다는 마음에 덜컥 사표를 내긴 했지만 줄어든 수입으로 애가 타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걸 메꿀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인턴 기간도 논문을 써야 하는 기간과 같아 마음 편하게 쓰면서 취업 준비를 하면 되었다. 자료를 찾고, 정리하느라 피폐해져 가는 날들이 지독히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눈물겹도록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맘껏 공부하며 괴로움으로 몸부림쳐 보고 싶었던 꿈을 조금이나마 이루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풍에 돛 단 듯 평화로우면서도 마지막 숨을 토해 내느라 헉헉대던 어느 날, 일생일대의 기회와 또 한 번 마주 앉았다. 공부하며 준비한 사회복지시설은 아니었지만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관에 취업을 한 것이다. 그동안 직업학교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나의 직업 인생을 결정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래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 후, 두 번의 직장이 직업전문학교였는데, 그게 발판이 되어 돋움 닫기를 했으니 말이다.
논문을 마지막으로 수정해서 제출해야 하는 날, 앞으로 13년간 몸담고 일할 여성새로일하기센터라는 곳에 면접을 봤다. 마침표와 시작점을 동시에 찍으며 온몸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모든 것이 계획표대로 되진 않았지만, 무언가 용기 내어 시도하면 내 생각보다 더 좋은 곳에 가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롭게 취업한 곳은 중소기업의 인력난과 경력단절 여성들의 취업난 해소를 위해 이제 막 개소하기 시작한 곳이었다. 덕분에, 어려움도 많고 넘어야 할 난관도 많았다. 해내야 하는 업무와 내려놔야 하는 자존심의 눈물이 댐을 쌓았다 부시길 반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고 기회도 많은 곳이었다. 일반 회사라면 감히 넘보지 못할 행운도 수시로 찾아왔다.
수없이 흘린 눈물과 한숨의 보상인지 팀원으로 입사한 지 일 년 만에 부팀장이 되었고, 다시 일 년 만에 팀장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평생 한 번 받기도 힘든 장관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12년 전업주부가 감히 꿈꿔보지 못한 LTE급 초고속 승진과 영광에 굽어있던 어깨가 펴지고, 주름졌던 마음이 반듯하게 다림질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상을 알게 된 것처럼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세상을 맘껏 날아다니는 파랑새가 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게 있겠어?', '젊은 사람도 많은 데 누가 날 채용하겠어?'하고 부정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이 사라지고 다른 세상의 눈이 떠졌다는 것이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오르지 못할 나무가 없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이 보였다.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동굴에서 밝은 세상으로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그 빛의 간지러움에 과거의 나처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여성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누군가의 말을 열심히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고, 절망과 두려움의 열차에서 행복열차로 갈아타게 되었다.
거친 바위와 절벽을 오르고, 성난 파도를 달래느라 피투성이가 된 날도 많았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일들을 묵묵히 해나갈 때 노력의 고통만큼 다디단 성공도 맛보았다. 물이 깊고 험한 계곡을 만날 때마다 "성공이 행복의 열쇠가 아니라 행복이 성공의 열쇠다. 자기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성공한 사람이다."라고 한 알버트 슈바이처의 말이 기분 좋게 들려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