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
퇴사 후 일분일초라도 허투루 보내면 저의 존재가 잊혀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어요. 그동안 수고했다며 편히들 쉬라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지요. 무엇이라도 잡고 있어야 살아 있는 것 같고 가쁜 숨이 조금이나마 내뱉어졌거든요. 보란 듯이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과 하루에도 몇 번씩 치고 올라오는 억울함의 끈을 잘라내기 위해 저 자신을 혹사시켰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할 수 있다는 데이터라벨러라는 자격증과 ESG 인플루언서라는 자격증에 도전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상담 수업에 주택관리사 자격증까지 넘보고 또 넘봤지요.
그중에 MKYU와 연세대학교가 콜라보 해서 만든 ‘ESG 인플루언서’라는 민간자격증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어요. 첫 시험이라 스터디를 하며 몇 문제씩 만들어 보는 정도가 다인 걸 기회 삼아 시험 범위 전체에 대한 문제를 만들어 보기로 한 거예요. 그렇게라도 해야 제가 쓸모 있고, 하찮아지지 않을 것 같아 눈에 불을 켜고 덤볐어요.
밥 먹는 시간의 상념조차 감당하기 어려워 컴퓨터 앞에서 끼니를 때우며 발버둥 쳤지만, 무너진 자존감은 땅바닥에 얼어붙은 채 꼼짝을 하지 않았어요. 출장으로 신나게 다녔던 공항 길을 걸을 땐 비참함의 눈물이 흘렀고, 매일 퇴근하던 길에선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몰려왔어요. 더 이상 피해자라고 외치는 것도 수치스러워 더 깊은 굴을 파고 또 파느라 지독히도 외로웠지요. 아는 사람을 만나고 연락이 오는 게 두려웠어요. 목놓아 운다고 해결되지 않을 일에 감정의 씨앗을 심고 이리저리 엉키고 싶지 않아 가족들이 있는 제주와 서울로 꼭꼭 숨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야 된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라는 남인숙 작가의 유튜브 영상을 우연히 봤어요. 온몸에 전율이 흘렀어요. 캄캄하게 닫혀있던 빗장이 턱하고 열리며 한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생각하지 말자는 생각에 빠져 고뇌했던 날들 때문에 더 힘들었다는 걸 알고 컴퓨터 속으로 더 파고들었지요. 그동안은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억울한 마음에 두드렸다면 이제는 생각하지 않기 위해 두 배의 속도를 낸 거예요. 잘못된 그 끈을 잘라내고, 저를 위한 진짜를 다시 연결하기 위해 하루에 15시간 정도를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두드리다 보니 생각의 파편들이 하나씩 희미해지고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사납게 요동치던 온몸의 세포들도 잠잠해졌는지, 더 이상 공항 가는 길과 퇴근길이 슬프지 않고, 아프지 않았어요.
거센 폭풍우처럼 휘몰아쳐대던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나자 철옹성처럼 거대한 벽이 서있던 자리에 새로운 희망의 아지랑이가 꿈틀대기 시작했어요. 추운 겨울을 이겨낸 봄날의 햇살처럼 향기로운 냄새도 코끝을 간지럽혔고요. 아직 여기저기 얼어있고 들떠있어서 더 녹아야 되고, 더 단단하게 밟아줘야 되지만 새로운 씨앗을 뿌리기엔 충분했어요. 더 이상 깨진 얼음을 부여잡고 슬퍼하는 바보가 아니라 폭풍우가 뒤엎어 놓은 땅을 갈무리하는 농부가 되라고 재촉하는 비도 내렸어요. 비가 갠 뒤, 맑아진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저 멀리 무지개가 두둥실 떠있어요.
그 순간 '앞으로 넘어야 할 더 크고 높은 산을 위해 주어진 단련의 시간을 잘 견뎌냈어. 참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 말이 도화선이 되었는지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터지기 시작했어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던 고통의 터널과, 벼랑 끝의 막막함에 허물어지지 않고 잘 이겨낸 게 자랑스럽고 고마워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어요.
이젠 허공의 메아리를 쫓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던 헛발질을 멈추고 '새로운 나'와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겠어요. 그 씨앗이 그동안 잘 가꿔오던 익숙한 것일지, 새로운 도전의 씨앗 일진 아직 모르지만 저에게 꼭 맞는 씨앗을 가지고 기회의 신이 찾아올 거라고 믿어요. 그 신을 알아보지 못해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열심히 거름도 주고 잡초도 뽑아놔야겠어요.
붓과 종이 대신 숯과 나뭇잎으로 공부해 크게 성공했다는 '고진감래'의 주인공이 제가 될 수 있는 날을 꿈꾸며 주어진 길을 힘차게 걸어가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