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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포테토 May 20. 2023

타인의 고통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분류된다.

즉, 사회적 일탈이라고 하며 이는 행동적 측면에 문제가 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도덕적. 양심적인 죄책감은 물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보통은 남에게 피해를 주면 미안함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둔감한 사람이고 양심에 대한 도덕적인 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양심에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전혀 거릴 것이 없고,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이다.


감정의 결핍인가?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의 결핍인가?

감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만은 확실하다.

감수성이 풍부하든, 그렇지 않든, 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 불행에 더 민감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심리학에서 사람의 행복한 감정을 측정하기 위해 사람이 어떤 대상에게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는지 묻는 도구를 '파나스'라고 한다.

파나스라는 정서 측정치를 통해서 행복을 측정하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행복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정서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생각할 때 행복이라고 하는 하나의 구별된 정서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그렇지 않고 이미 내가 어떤 일을 하면서 호기심도 느끼고 있고, 만족도 느끼고 있으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현대 시대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여러 매체를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하지만 우린 밖에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물어보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극적인 것을 극적이지 않게 만드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쭉 지켜보면서 타인이 느끼고 있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감아 버리고 외면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과연, 타인의 고통은 우리와 무관한 것일까?

고통은 이 지구상에 어디든 존재한다.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마음을 휘저으면서 그 고통을 자극하고 있는지를


타인의 고통을 누군가 말해준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이 겪었던 고통을 전혀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 고통을 이해하지도, 알아들을 수도 없다.


아직도 수많은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고, 아주 손쉬운 형태로 그 비극들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그들의 고통을 진실로 이해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고통이라는 감정에 있어 타인은 영원한 타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을 마치 구경꾼처럼 바라봐야 할까?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그대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 나는 너의 아픔을 알아" 대신에 "직접 경험하지 않았고, 너의 아픔을 감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으로 위로를 전해야 한다.


공감이란? 타인의 기쁨, 슬픔, 공포와 같은 정서를 공유하며 이해하는 능력을 뜻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았을 때 그 어떠한 감정을 공유해야 한다.


고통은 다만 바라볼 뿐 실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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