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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Oct 18. 2024

여름의 눈 (1)

단편소설 


여름의 눈  (1)  



  이진은 기쿠치 모모코의 음악을 좋아했다. 나는 일본어를 몰라 모모코라는 일본 가수의 노랫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목소리가 청순하다는 느낌만 받았다. 이진은 가사 내용을 몰라도 누구나 노래를 즐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리듬과 박자가 아무리 좋아도 가사 내용을 모르고선 음악을 즐길 수 없었다. 결국 이진은 가사 내용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청춘이 심술쟁이라는 거야. 이 곡은 좋아하는 남자애가 떠난 뒤에 여름이 조금 싫어진다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어. 


  이진은 자신이 세상을 떠도는 존재고 외모에 비해 나이가 훨씬 많다고 했다. 그래서 1980년대 일본 아이돌 가수의 음악을 잘 알고 있다는 거였다. 자신이 기이한 존재라고 주장했지만, 내가 볼 때 이진은 평범했다. 섹스 기교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우선 흥분하면 눈가에 핏발이 서고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렸다. 입술이 붉어지고 입은 크게 벌어졌다. 따스한 입김이 새어 나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건 마치 영화 속에 초자연적인 존재 같았다. 긴 송곳니가 잇몸 사이로 번쩍 돋아날 때는 절정에 이른 순간이었다. 그러면 나 역시 견딜 수 없는 욕정에 휩싸였다. 우리는 서로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이진은 손을 뻗어 나를 침대 위로 밀쳤다. 거칠고 부드럽게 나를 올라탔다. 두 팔로 내 목을 어루만지듯 짓누르다가 이내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평범했다. 


  물론 평범한 섹스였지만 그때마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몸 안에 새로운 피가 가득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이진은 혀를 내밀어 내 볼을 핥고, 차가운 송곳니를 내밀어 내 목덜미를 스치고, 곧 파고들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나는 아득해져서 애원했다. 제발, 날 물어. 내 피를 마셔! 하지만 이진은 나를 물지 않았다. 섹스가 끝나면 이진은 본래의 조용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기쿠치 모모코의 노래 「섬머 아이즈Summer Eyes」를 들으며 눈빛도 다시 순해졌다. 하얀 송곳니는 슬그머니 모습을 감췄다. 


  실제로 이진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이진의 정체에 대해 나름 이리저리 알아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햇빛을 싫어한다는 것 외에. 그래서 나는 조금씩 우울해지고 불안했다. 이진은 자신의 주장대로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한 존재 같았다. 나를 만나게 된 것은 운명이 아니고 우연일 뿐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여름 햇살 아래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내 이마는 절로 찡그려졌다. 하지만 이진은 내가 속한 세상을 당황스럽게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고민한 적도 없었고 우울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흥분하면 잠시 송곳니가 길어지는 돌연변이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도 거짓말 같지 않았다. 거창한 불사의 몸이 아니라, 홀로 버섯처럼 자라난, 특이한 성격을 지닌 존재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사실 누군들 그러하지 않을까. 나 역시 부모로부터 몸을 물려받았지만, 부모를 본 적도 없고, 왜 하필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으니. 


  나의 불안은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다. 이진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진이 언제라도 내 곁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게 현실이 될 수 있어 두려웠다. 


  “나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뭐지?" 내가 물었다. 

  “몰라.” 이진이 대답했다.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뭔가 끌리는 게 하나도 없었단 말이야?” 내 목소리는 저절로 예민해졌다.

  “몰라. 눈빛이 조금 마음에 들었던 같기도 하고. 자세한 기억은 없어…….”

  “뭐야, 그게 전부?”

  “목이 길고 깨끗해서 좋았어.” 

  “나를 물고 싶었다는 거네. 그런데 왜 여태 안 물어? 네가 내 목을 물면 나도 불사의 몸이 되는 거 아닌가?” 

  “몰라. 한 번도 누구를 물어본 적 없어.” 이진은 순진한 눈을 깜박거리며 대답했다. 거짓말 같아서 다시 추궁했더니, 착한 사람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나쁜 사람은 물었다는 뜻인지? 이진은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계속) - 내일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


《문학사상》 2022년 10월호 (600호 기념 특대호) 수록 작품입니다. 《문학사상》은 얼마 전에 휴되었으나, 새 주인을 맞아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응원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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