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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Oct 20. 2024

여름의 눈 (3)

단편소설

여름의 눈  (3)  



  다음 날, 기운을 차렸다. 신기하게도 온몸이 가뿐했다. 이진의 피가 마치 부신피질 호르몬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혈색이 좋아졌다. 팔과 다리도 가벼웠고 힘이 넘쳤다. 피부도 깨끗해졌다. 무엇보다, 까닭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나라는 인간이 변한 느낌이 들었다. 이진에 대해 품었던 질투와 의심, 궁금증 같은 것들도 거품처럼 사라졌다. 만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날부터 번역 작업도 아주 손쉽게 풀렸다. 영어 단어들에 대한 기억이 또렷했고 문장의 숨은 의미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영어 문장을 한글 문장으로 옮겨 적을 때도 가장 적합한 어휘들이 절로 떠올랐다. 기분이 상쾌했고, 밀린 일거리를 단숨에 마칠 수 있었다. 


  출판사에 들어갈 때도 여느 때와는 다르게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편집자도 내 모습에서 뭔가 달라진 것을 알아챈 듯했다. 삼십 대 중반의 그녀는 내가 번역한 원고를 찬찬히 읽어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포소설의 분위기를 잘 살린 것 같아. 이제까지의 번역보다 훨씬 좋아졌어. 이번에도 부실한 번역을 가져오면 다시는 계약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다행이네. 


  나는 전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장수처럼 자신감이 넘치기 시작했다. 이진의 피가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이진의 피가 원기를 돋아주는 강장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강력한 전기가 몸속 깊숙이 흘러들어 나를 충전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 자신도 과거와 다른 사람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달라지는 내 모습에 나 자신도 놀랄 때가 있었다. 예전에 예민하게 신경 쓰던 일에는 점점 무심해지고 냉정해졌다. 반대로 이전에는 사소하게 여긴 일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눈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더 이기적인 인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진을 설득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진의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진은 그 이상의 요구는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내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주일 한 번 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이진은 강하게 거절했다. 자신의 피를 마시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했다. 나는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진을 어르고 달랬다. 화를 내기도 했다. 마침내 이진은 강압에 못 이겨 마지못해 피를 주었다. 그래도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중독이 점점 더 심해졌다. 


  이제 이진이 어떤 존재인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그런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직 이진의 피만 필요했다. 이진이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문제는 이진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안심할 수 없었다. 불안감이 날로 커지기 시작했다. 조만간 이진의 피를 매일 마시게 될 게 틀림없었다. 


  나는 출판계에서 놀라운 실력을 지닌 참신한 번역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번역한 문장은 정확했고 힘이 있었다. 심지어 원작의 느낌보다 더 반짝이는 문장으로 번역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거리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번역을 밤새 해도 지치지 않았다. 이진의 피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활력이 넘쳤다. 빠른 속도로 번역한다는 점도 내 명성을 높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진이 갑자기 떠나 버린다면?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계속) 내일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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