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이진은 보름에 한 번 정도 외출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라면 매우 그럴듯하겠지만, 이진의 외출과 자연현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어림잡아 보름마다 눈썹을 손질하고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뒤 일어섰다. 돈 벌러 가. 그게 이진이 내게 말해 준 전부였다. 어디서 뭐 하게? 나는 절박한 심정에 찔러보았지만, 이진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몸에 밀착하는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집을 나섰다. 나는 서너 번 이진을 미행했지만, 이상하게도 두어 구역도 못 가서 이진의 행방을 잃어버렸다. 어둠 내린 거리에서 그때마다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나를 영영 떠나버리면 어떻게 하지? 두려운 심정에 다시 휩싸였다.
하지만 이진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항상 아침이 밝기 전에 돌아왔다. 나는 무심한 척 이진을 맞았다. 외출에서 돌아온 이진의 안색은 화사했다. 창백하던 얼굴에 윤기가 돌았다. 가슴은 수밀도처럼 부풀어 올라 보였다. 이진이 내게 웃으며 키스했다. 박하 향내가 났다. 구강청정제 같았다. 가그린 향내 뒤로 희미한 피 내음 같은 것이 어렴풋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의 피를 먹고 온 것인지, 아니면 술만 마신 건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런 날 이진은 활기찬 표정으로 모모코의 「섬머 아이즈」를 들으며 가사 내용을 친절히 해석해 주었다. 오두막의 창이 열리고, 코발트 빛 산호가 빛나면, 햇볕에 타오르는 옆모습, 망설여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소년 같아.
어느 날 나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미적거리던 번역 작업에 몰두한 탓인지 몸살이 일어 꼼짝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이진에게 자주 화를 내곤 했다. 이진이 나를 물지 않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이진이 나를 물면, 영원히 이진과 함께 살아갈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진은 나를 떠나갈 사람처럼 무심하게 굴었다. 나는 버림받는 게 아닐까? 날이 갈수록 의심은 심해졌다. 왜 우리가 가족이 되면 안 되는 걸까? 비밀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이진은 결코 나를 물지 않았다. 그건 매우 위험한 짓이라고 했다. 나는 화가 났다. 느닷없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눈을 치켜뜨고 이진의 목을 두 손으로 힘껏 짓눌렀다. 이진은 눈을 크게 떴다.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내 손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열병이 지속되었다. 나는 크게 앓기 시작했다. 가벼운 바이러스일 뿐이야,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면 이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름이었고 밖에서는 면역력 없는 질병이 세상을 떠돌고 있었다. 밤이 되자 보름달이 떠올랐다. 불현듯 나를 간호하던 이진의 형체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달빛이 창문 커튼 사이로 방에 스며들었고, 나는 이진의 형체가 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땀 내음, 희미한 숨결, 아득한 손길, 나는 깊은 의식불명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을 꾸었다. 기이한 스핑크스를 만나는 꿈이었다. 신화에 나오는 스핑크스는 여자의 얼굴에 사자의 몸을 지닌 괴물인데, 테바이 성벽의 바위 꼭대기 위에 앉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질문을 던졌다. 신화 속의 요괴, 에로틱한 에너지를 가진 스핑크스가 꿈에서 나를 유혹했다. 새하얀 성벽의 열기와 번득이는 햇살 아래에서 이글대는 눈빛과 탐욕스러운 입술로 내게 다가왔다. 낮은 속삭임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는 누구인가?
숨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려움이 나를 덮쳤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열기가 물러가고 등 뒤로 써늘한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다. 스핑크스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채 나를 휘어잡았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갑자기 내 안에서 까닭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두 손을 뻗어 스핑크스 여인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내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솟아나는 게 느껴졌다. 스핑크스 여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러서려고 했다. 나는 길게 드러난 그녀의 목을 물었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피 내음이 내 입안에 가득 고였다.
눈을 뜨자 이진의 손이 보였다. 하얀 손바닥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진의 손바닥 가운데에 선명한 칼자국이 보였다. 이진은 칼로 제 손바닥을 그어 내 입에 피를 떨구고 있었다. 이진의 핏방울이 이진의 눈물 한 방울과 함께 내 혀와 입술, 눈가에 뚝뚝 떨어졌다. 내 의식이 흐려졌다. 무언가 아릿한 고통이 가슴에 파고드는 것 같았다. 이내 고통이 잦아들더니 부드럽고 달콤한 숨결로 변했다.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꿈을 꾸지 않았다. 깊고 어두운 잠이었다.
(계속) 내일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