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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17. 2022

외벌이 가장의 새벽 출근

남편을 깨우는 역사적 사명을 띤 아내의 새벽 일기

22. 11. 17.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나 내일 6시까지 가야 하니까 일찍 좀 깨워 줘."

지난 주말, 그리고 그 전 주말과 이번 주 내내 초과근무를 하고 돌아온 초췌한 얼굴의 남편이 말했다.

"응. 알았어. 걱정 마.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자."

"내일은 절대 늦으면 안 되는 거 알지? 꼭 깨워 줘야 돼!"

"걱정을 말라니까. 얼른 들어가."

어젯밤만큼은 한가하게 만담을 주고받을 여유가 서로에게 없었다.



다정하다기보다 만담꾼에 가까운 그는 어제도 쉽사리 잠자리에 들려하지 않았다.

"자기 얼굴 피곤해 보인다. 오늘 일 많았어?"

"일이야 항상 많지. "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았는데?"

"뭐 집안일 이것저것. 애들도 챙기고."

이쯤 되면 나는 언제나 그 실체도 없는 집안일이란 것의 '실체'에 어리둥절 해기까지 한다. 육아휴직을  했을 때부터 품기 시작한 그 의문, 평생 아리송한 일이다.


남편은 출장을 가면 출장 신청서를 낼 것이다.

날짜와 시간과 장소와 출장 내용은 문서화되어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남편은 교육을 가면 교육 수료증을 받게 될 것이고 승진에 필요한 점수를 얼마 정도 얻게 될 것이다.

가끔 쉬고 싶을 때면 남편은 연가를 쓸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그에게 주어진 21일의 연가 일수가 든든하게 그를 지원해 주고 있고 필요한 경우 선심 쓰듯 이용하면 될 일이다.

오늘은 17일, 오전에 남편의 월급이 입금될 것이다.

한 달간의 노동의 대가가 숫자화 되어 선명히 한 줄 자국으로 찍힐 것이다.

믈론 남편 명의의 월급통장으로 말이다.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을 충당하라는 의미로 더도 말고 덜도 말자는 한가위처럼 그는 나에게 나와 두 아이의 보험료와 각종 공과금을 내고 반찬값을 하라며 정확히  생활비 명목으로 50만 원을 입금해 줄 것이다.

그가 나를 먹여 살리고 있다.

두 아이들까지 덩달아 먹여 살리고 있다.

한 사람에게 매달린 세 사람의 목숨들이 때론 부담스럽고 너무 무거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쓴 만큼 대가가 따르는 그는 유, 무형의 무언가로 보상을 받고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그는 어젯밤 내게 말했다.

"내일이 월급날이네. 너무 월급에 얽매어 사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거기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그 기분 모르겠지?"

멋쩍은 헛웃음으로도 그의 속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근거가 없다.

증거가 없다.

변화무쌍한 살림살이에 이렇다 할 내세울 형체가 없다.

세상에는 내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바치고도 손에 쥐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꼭 물질적인 보상이 따라야만 보람이 있는 것도 아니긴 하다.


비단 오늘이 수능일임과 동시에 남편의 월급날이라서가 아니다.

혼자서 가족 먹여 살린다고 애쓴다.

직장은 없지만 나도 나름 가정에 충실(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히 남편 뒷바라지며 아이들 양육에 살림에 애쓰는 중이다.

보수는 없지만 내겐 억만금을 주고도 못 산다는 대단한 시간이 있다.

나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사랑하는 두 아이를 보듬어 깨울 것이다.


나의 기쁨, 나의 고통.

고마운 사람.

그러나 남편까지 새벽부터 보듬어 줄 용기는 없다.

공과 사는 반드시 구분해야 마땅하리.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고 감히 남편을 보듬어 보는 일과 연관 짓지는 말아야 한다.

둘 사이에는 그 어떤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내가 남편을 보듬는다는 것, 그것은 크나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수능날은 꼭 수험생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누구라도 평소 먹던 대로 먹고 하던 대로 행동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어젯밤 건넨 곶감에 입맛만 다실 뿐  먹지는 않았다.


평소와 다른 행보를 보였다가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주차장 근무를 하게 된 자랑스러운 그를 위해,

꼭두새벽부터 난데없는 아내의 공격으로 인하여 그의 일과를, 그 학교의 수능일을 망치지 않기 위해,  

그래서 나는 늦지 않게 이 새벽에 단지 그를 깨워주는 일에만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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