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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14. 2022

생일날, 남편에게 다들 이 정도 선물은 받으시죠?

출산 축하 꽃바구니는 나에게로 와서 생일 축하 꽃바구니가 되었다.

19. 12. 17. 자자손손 물려 줄 어떤  증거자료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이게 웬 꽃이야? 자기가 돈 주고 절대 샀을 리는 없고? 어디서 났어? 오늘이 무슨 날이야?"

"몰라. 새언니가 주던데?"

"갑자기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주고 싶었나 보지 뭐."

"이상하네. 갑자기 꽃을 다 주시고."


2019년,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그때가 결혼한 지 8년도 넘어가던 해였다.

결혼 전에도 두 번 그날이 있었으니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그 양반은 아내라는 사람의 생일날을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나만 혼자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6일 후가 그 양반의 생일이었으므로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는 언제나 자연스레 그날까지 기억을 하게 되었다.


"아니, 벌써 들어오면 어떡해?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어? 엄마, 벌써 끝난 거야?"

그 해에 첫째인 딸이 초등학교 입학을 하게 되어 육아 휴직을 시작하고 집 앞에서 운동 삼아(그게 운동이 과연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그 양반이 퇴근을 한 후 그날도 나는 필라테스를 하고 왔다.

내가 현관문을 열자 그 양반은 아주 당황해하며 호들갑을 떨면서 후다닥 부엌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더 놀라서 뭔가를 수습하려는 듯 저희들끼리 거실 한쪽 구석으로 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엄마 생일이라고 미역국 끓였어."

"진짜야, 엄마. 아빠가 엄마 좋아하는 케이크도 사 왔어."

식탁에는 과연 내 얼굴보다도 더 큰 케이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다.

매장에 남아 있는 걸로 무조건 큰 걸로 집어 왔겠지 뭐.


"자기야.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자기 생일인 거 다 알고 있었어. 그냥 모른 척한 거야."

"아빠. 왜 거짓말해? 아빠 모르고 있었잖아. 누나가 말해 줘서 안 거잖아!"

때늦은 변명을 해 봤지만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아들에게 들통나고 말았다.

여섯 살의 정직함이 서른일곱 살의 간교함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이미 음력으로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기특한 딸은 아빠가 안타까운 나머지  차마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 양반이 퇴근하기 전에 나와 아이들은 그가 내 생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기를 했었다. 물론 셋 다 '절대 모른다.'에 걸었다.)


내 생일은 음력으로 챙기기 때문에 매년 날짜가 바뀐다.

그러나,

음력으로든, 양력으로든 나와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맞는 날짜를 짚어내지 못하였다.

뿐이랴, 비슷한 날짜 근처에도 못 가보기 일쑤였다.

그 양반도 나름 핑곗거리가 있긴 했다.

"자기 생일은 음력이라 헷갈린단 말이야. 내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자기 생일이 음력으로 11월 26일  맞지? 나도 다 알아!"

호기롭게 큰소리쳤으나 그 날짜가 누구의 생일인지 나는 모른다.

내 생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 옛날 전 여자 친구 생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그 양반에게 숨겨 온 다른'자기'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한 번만 더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면 도대체 그 여자가 누구냐고 담판을 지을 생각이다.

서 너 번을 더 찍어 말하고서야, 보다 못한 딸이 나서서 정정해 주고 나서야 내 음력 생일 날짜는 원위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 저 꽃 자기 생일이라고 준 거야?"

그 양반이 꽃의 출처를 끈질기게 따져 물었다.

"그래! 새언니가 내 생일이라고 축하한다고 하면서 나 주더라."

코가 길어져봐야 얼마나 길어지겠냐, 눈 한번 질끈 감고 거짓말 한 번 속 시원하게 했다.

"아니. 새언니가 엊그제 아기 낳았잖아. 병원에 꽃 배달이 왔는데 원래 안 되는 거잖아. 그래서 축하 선물로 들어온 꽃 그냥 나 준거야. 어차피 언니는 퇴원하면 조리원 가 있을 거고 집에 갖다 놔 봐야 볼 사람도 없고 해서. 새언니가 내 생일을 어떻게 알고 나한테 주겠어? 남편도 모르시는 내 생일을!"

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물론.

조금은 우습지만 이건 내 자존심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새언니의 출산 축하 꽃바구니는 내 생일 축하 꽃바구니로 둔갑하여 우리 집으로 무사히 모셔진 것이다.


"고맙네. 내 대신 꽃도 다 선물해 주고."

그 양반은 끝내 눈치를 못 챈 모양이다.

"오늘 저녁은 내가 차려줄게. 얼른 와. 내가 미역국도 끓였어. 자긴 고기 들어간 거 안 좋아하니까 그냥 조개 넣고 끓였어."

"우와. 웬일이야? 미역국까지 다 끓이고. 정말 대단하다. 고마워. 역시 자기가 최고야!"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가스레인지 위에 미역국이 잔뜩 흘러넘쳐 그 양반이 내 생일을 챙겨준 흔적을 역력히 증거자료로 남겼다.

조개 국물이 넘쳤으니 비린내도 온 집안에 진동했다.

국 한 숟갈을 뜨기도 전에 저걸 어찌 닦아 내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하다가 좀 넘쳤어. 미역이 좀 많았나 봐."

그것은 미역국이라기보다 미역볶음이었다.

"아니 미역을 얼마나 많이 넣었길래 저래?"

그 양반이 사 온 미역은 40인분짜리였다.

반도 더 사용한 것 같았다.

언제 산후 조리원 사업이라도 나 몰래 시작하셨나?

어느 산모를 먹이시려고 저리도 대범한 행동을 하셨단 말인가.


우리 가족은 4인인데, 40인분 짜리가 굳이 필요할까 싶었다.

누구를 초대했나?

이따가 더 올 사람이 있나?

올 사람이 없으면 또 어때?

그날은 20인분 정도 끓였으니까 1인당 5인분씩 가뿐하게 먹어 치우면 그만이다.

더 불어나기 전에 먹어 치우면 된다.

뱃속에서 불어 터지고 목구멍까지 올라와 난리가 나더라도 일단 미친 듯이 마시자.

일도 아니다 그까짓 거.


"미역이 작게 잘려 있어 가지고 양이 얼마 안 되는 줄 알고 계속 넣었더니 저렇게 됐어."

"이 human아! 미역은 불려서 쓰는 거야. 어디 밥차 나갈 일 있어?

조금만 담가서 불린 다음에 끓였어야지.  말린 걸 그냥 그대로 넣고 끓이면 어떡해? 아무리 살림을 안 해봤다고 그렇게도 몰라? 모르면 좀 뒤져봐서 보고 배워서 하든가! 한글을 몰라? 인터넷을 못써? 도대체 뭐가 문제야? 제발 사고 좀 치지 마. 미역국 안 끓여 줘도 돼. 평소에 그냥 잘하면 되는 거지. 왜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고 그러실까? 하던 대로 하란 말이야 그냥. 제발 그냥 가만히만 있어 좀!"

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물론.


"그래도 내가 자기 좋아한다고 조개 미역국 끓였어. 많이 먹어."

그래, 성의를 생각해서 먹는 시늉이라도 하자.

그러나,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시킨다고 무조건 하지 않는다.

어지간해야 말이지.

"많이고 뭐고 국을 먹을 수 있게 끓여 놨어야 많이 먹지. 조개 이거 해감은 한 거야? 어패류는 사 와서 소금물에 해감을 꼭 해야 한다고 내가 전부터 얘기했어 안 했어? 내가 말할 때 뭐 들은 거야? 안 그러면 모래도 씹히고 잘못하면 이도 상해. 하루 정도 미리 소금물에 조개 넣고 검은 봉지 같은 거 씌워 놔서 해감 해 놓고 잘 헹궈서 그런 다음에 국에 넣었어야지. 내가 음식 해서 주니까 그냥 쉽게만 보였지? 다 시간 들이고 공 들여서 음식 하는 거지 거저 되는 게 세상에 어디 있는 줄 알아? 어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그렇게도 모르실까. 무조건 사고부터 치지 말고 먼저 좀 배우란 말이야. 모르면 배워야지. 무작정 일 저지르기만 하면 다야? 대충 넘어가려고 하지 마. 하긴 내 생일인 걸 안 것도 한 시간도 안됐는데 내가 뭘 바라겠어. 진심이야. 가만히 있기나 해.부탁인데 차라리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제발~"

이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물론.


나는 생일이라든지 결혼기념일 이런 것들을 악착같이 챙기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세상에는 믿기 힘들지만,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설마설마했는데,

그럴 리가 없겠지만,

부부의 생일날, 결혼기념일에 꽃다발도 주고받고 선물을 주고받는 부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

게다가 그런 날에 외식까지 하는 가족도 있다고 한다.

과연 이건 어느 별나라의 이야기인가?

흉흉한 소문일 거라 확신한다.


생일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평소에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꼭 기념일이 아니더라도 신경 써 주고 배려하고 인정해 주는 그 마음 하나만 있으면 족하지.

그러나 그 무엇도 우리 부부에겐 없다.

성향이 그런 사람이려니 하면서도 너무나 무관심한 그 양반의 태도에 아주 가끔은 서운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피차 그런 일 가지고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므로 조용히 입 다문다.


아무것도 안 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그저 조촐하게 그 양반의 생일날 아이들과 케이크를 같이 만들고 미역국을 끓이고 생선을 굽고 나물을 하고 전 몇 가지 부치고 잡채나 하고 살짝 아쉬워 고기반찬 조금 해서 생일상을 차린다.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데 그 양반 보고 내가  감히 뭐라고  할 말이 있겠는가.

이젠 뭘 더 바란다거나 그런 마음도 사라진 지 오래다.



급조된 생일파티(?)였지만 그래도 요란하고도 순식간에 준비한 그의 정성을 생각해 구역 꾸역 5인분의 미역국을 다 먹어치웠으나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고 이제야 양심 고백한다.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나의 뒤치다꺼리.


그 양반의 정성의 흔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름 16센티미터짜리 편수 냄비에 20인분의 미역을 넣고 국을 끓였으니 안 넘치고 배기겠나.

그날 밤 나는 몇 시까지 부엌 정리를 하고 가스레인지를 청소했던가.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생일빵'이라고 한다지 아마?


어느 순간 반갑잖은 그 양반이 등 뒤로 다가와 말했다.

"가스레인지 청소하기 힘들지? 다음에 인덕션으로 바꿔야겠어. 그래야 자기가 소하기 편하지."

그러나,

"청소할 일을 애초에 안 만드는 게 최고지."

라고 대꾸하는 건 사치였다.

그리고 내 양심을 걸고 밝히는데 그날의 내 표정은 저렇게 화사하지도 않았다.


* 이듬해 가을, 과연 그 양반은 기어이 인덕션으로 바꾸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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