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아니아니. 그래서? 언니는 뭐라고 했는데?”
카페 창문은 손바닥 두 개를 이은 것만 했다. 그래서 들어오는 빛이 적었다. 이국적이며, 고풍스러운 의자와 테이블은 아주 오래전 바다를 건너온 게 분명했다. 중간중간 보이는 흠집은 어느 제국 여왕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하얀 몰티즈가 긁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여왕의 내연남이 은밀히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작은 나이프로 그어둔 게 분명했다.
어둡지만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에서는 노란 빛 망울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빛들은 분홍빛이 도는 낡은 벽지를 타고 내려오더니, 고동색 나무 바닥으로 흘러갔다. 율이 그곳을 좋아한 이유는 어느 시간에 오더라도 붐비는 사람 없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명도가 낮고 적막함이 흐르는 공간은 언제나 율에게 안정감을 줬다. 기억 날일 없지만서도 ‘엄마 뱃속이 이런 느낌일까?’ 하며 잔뜩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율은 그런 여자였다.
그런 이유로 맞은편에 앉은, 민지의 방정맞음은 율의 안정감을 두세 꺼풀 벗겨냈다. 율은 눈을 찡그리고는 검지를 입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다른 손은 눈높이에 닿은 허공에 휘저었다. 그 모습에 민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머리카락이 어깨나 옷깃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율과 민지에게 들렸다. 둘은 동시에 빼꼼히 혀를 내밀더니 살며시 입꼬리만 올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누구더라도 율이 민지에게 꺼낸 이야기를 듣자면, 이런 정숙한 곳에서도 방방 뛰며 소리를 지르거나, 여러 번 손뼉을 칠게 분명했다. 어쨌든, 민지가 손가락으로 테이블 툭툭 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래서 뭐라고 했냐고요. 이야기를 왜 하다 말어?”
사실 그 이후에 대해 율은 구체적으로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충격적이고 강렬한 사건이지만, 손으로 넘긴 새하얀 페이지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아무일도 없었으니깐.
***
그날도 평소와 다른 건 없었다. 시큰거리는 손목으로 현관문은 여전히 무거웠다. 율은 신발을 벗더니 나갈 방향으로 돌려 두었다. 그녀가 원룸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하는 일. 그것은 매서운 눈보라가 치더라도 환기부터 했다. 그리고 큰맘 먹고 12개월 할부로 구매한 무선 청소기를 돌렸다. 퇴근한 율은 언제나 일과가 같았다.
그날은 수요일로 비닐이 벗겨진 플라스틱과 고이 접힌 종이상자를 밖으로 내놓는 날이었다. 율은 양손에 분리수거 거리를 한가득 쥐고는 돌려놓은 신발에 발을 넣었다. 그리고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더니 역시 돌려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팔꿈치로 손잡이를 밀어 열었다.
율이 어두운 복도를 지나가자, 천장에 달린 조명이 발걸음을 따라 켜지고 꺼졌다. 길 끝에 다다르자, 눈앞에 보이는 엘리베이터. 혹시나 했지만 역시 그랬다. 커다란 철문 위로 보이는 검은 화면에는 붉은색으로 쓰인 숫자 3이 보였다.
며칠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 하고도 3주가 지난 지금. 율이 분리수거하려는 시간에는 언제나 엘리베이터가 3층에 머물러 있었다. 지난주까지는 그러려니 했지만, 그날은 어딘지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그 감각은 그저 근거 없는 느낌이 아니었다.
「 띵. 3층입니다. 」
율이 9층에서 탄 엘리베이터는 이내 3층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는 급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동자를 살며시 올려 뜨고는 앞을 바라봤다. 단조로운 리듬으로 뛰던 심장은 이내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고 영하로 내려간 기온에 롱패딩까지 걸쳤지만, 등허리로 굵은 땀방울 하나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 드르륵. 덜컹. 」
그의 옷차림은 언제나 똑같았다.
짙은 회색 후드티는 언제 샀는지 옷소매는 허옇게 닳아 있었고, 펑퍼짐한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는 한껏 무릎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율이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의 손톱. 자르거나 다듬지 않은 긴 손톱 몇 개에는 때가 껴 있었다. 율은 후줄근한 옷차림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손이나 거뭇한 수염 자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속으로 멀쩡한 허우대가 아깝다며 혀를 끌끌 찼다.
한 달 하고도 3주가 지난 그날. 그 이상한 남자와의 조우는 벌써 일곱 번째였다. 한치의 엇갈림도 없었다. 그러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율은 언제나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저 후드티가 허락하지 않은 움직임을 보인다면, 꽥하고 소리를 지르며 주머니에 넣어둔 호신용 스프레이를 눈동자에 분사해 버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1층까지 거리는 짧았고 그와 한 공간에 갇힌 시간도 짧았다. 9층에 살아 계단으로 내려가는 게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여섯 번째 만남 동안 그는 한 손에 검은 비닐을 쥐고 그저 정면을 응시하는 것 이외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그게 율이 매주 수요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이유이기도 했다.
「 드르륵. 덜컹. 」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율은 후드티가 먼저 나가길 기다렸다가 언제나처럼 뒤를 따랐다. 그리고 둘은 캔과 플라스틱 그리고 크고 작은 상자들이 겹쳐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정리한 분리수거 거리를 순식간에 정리하고는 재빨리 돌아섰다. 그도 그럴 것이 인사도 없이 매번 마주치는 후드티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율은 양손을 패딩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고 돌아섰다.
“저기.”
율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후드티를 입은 사내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는 몇 가지 상상해 보곤 했는데, 아마도 연락처 따위를 물어볼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율의 머릿속에 그의 손톱에 낀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번호를 알려줄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혹여나 강압적으로 돌변하거나 협박한다면, 전화번호 뒤에 3자리를 바꿔 알려줄 요량이었다.
“네……?”
율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미간이 구겨졌지만, 입가는 살며시 올라간 애매하고도 어색한 표정이 얼굴에 번졌다.
누군가 그녀의 연락처를 물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한 번은 버스정류장에서 매번 마주치던 한 남자가 당당하면서도 정중하게 번호를 물었다. 썩 기분 나쁜 일은 아니기에 분위기에 휩쓸려 번호를 알려줬다.
그리고 한 달 정도는 연락을 이어가며 만나기도 했다. 율은 진득하고도 천천히 그를 알아가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든 빨라지길 바랐다. 서로 다른 속도는 언제나 그녀에게 부담이었다. 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그가 잡은 손을 살며시 빼내자, 그는 볼멘소리와 함께 심술을 내더니 이내 짜증까지 냈다. 그렇게 좋지 않은 기억 하나가 마음속에 새겨졌다.
가로등 노란 불빛이 율과 후드티 사이에 경계를 비췄다. 그래서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율은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겨우 그의 그림자만 보였다. 율은 나쁜 기억을 하나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발끝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한기에 우두커니 그의 말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저기. 저 부르셨어요……?”
그 물음에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율의 어깨는 움츠러들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발끝만을 슬쩍 대로변 쪽으로 보냈다.
달빛과 가로등 불빛이 동시에 그를 비췄다.
오뚝한 코와 쌍꺼풀 없이 쭉 찢어진 눈, 하얀 얼굴에는 잡티 하나 찾기 어려웠고 어디가 아픈지 몰라도 입술은 핏기가 없었다. 그리고 관리되지 않은 덥수룩한 앞머리는 눈썹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슬쩍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오른손을 들어 무언가를 쳐다봤다. 율의 눈동자도 거길 향했다. 그리고 후드티 손에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작은 수첩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말은 율이 상상해 둔, 수많은 시나리오에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처음…인사드려요. 저랑 결혼하실래요?”
***
“뭘 어떻게 해. 아니요! 아니요! 소리 지르면서 집으로 뛰어갔지. 헤헤.”
“와. 진짜 대박이다…. 걔 진짜 또라이 아니야?”
민지는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한 카페에서 최대로 낼 수 있는 소리로 율에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니냐, 스토킹 아니냐, 이사 가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등. 한껏 율을 겁주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 그래도 얼굴은 어때? 키는?”
민지의 물음에 율은 사진처럼 찍혀있는 어제저녁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굳이 고르자면 잊고 싶은 기억이긴 했지만, 그 장면은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키는 180cm 좀 안 되려나…? 어두워서 얼굴은 잘 못 봤는데,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약간 늑대 상 같은 느낌?”
“늑대?”
“응.”
민지는 블루베리 에이드가 절반 정도 담긴 유리컵에 빨대를 휘젓더니, 훤히 입꼬리를 올렸다.
“아. 내 스타일인데…. 언니는 그런 얼굴 싫어하지 않아? 둥글둥글한 사람 좋다며.”
율에게 민지의 질문은 의미 없었다. 둥글둥글하거나 멀끔히 앞머리를 넘겨 슈트를 입었더라도 갑자기 결혼하자는 그런 사람에게 달가움이나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부모. 특히 정수리가 훤히 드러난 아빠한테 이야기한다면, 그러게, 왜 자취를 했냐며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음날 이삿짐센터를 부를 게 뻔했다.
민지는 수요일. 즉, 분리수거하는 날 제외하고 그를 마주친 적은 없는지 물었다. 율은 눈동자를 위로 치켜뜨며 오고 다니던 출퇴근 길을 떠올렸지만, 그를 만난 적은 없었다. 민지는 몇 가지 흥미로운 추리를 했는데, 율이 느끼기에 가장 그럴법한 이야기는 그녀가 내려오기를 매번 3층에서 기다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니깐 그게 맞아. 언니가 항상 같은 시간에 분리수거를 나가잖아. 그래서 그놈이 기다린 거야. 계속 간 보다가 어제 딱 이야기한 거지.”
율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결혼은 진짜…. 미친놈 아니야?”
민지가 한껏 눈썹사이를 구기며 해댄 추리도 그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어. 미친놈 맞아. 언니 혹시 모르니깐, 경찰한테도 신고해 둬. 아니면 오늘은 내가 데려다줄까?”
민지의 말에 율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후로 카페에서 나가 검회색의 눈길을 해치며 지하철역에 도착해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도 민지는 미친놈과 조심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율은 집 앞 골목 끄트머리에 멈췄다.
양손은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허연 입김이 속절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회색 후드티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 또라이가 가로등에 기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