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왜 10%야! 20% 해야지!!
“세상 물정 모르는 우리 딸…”
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도대체 세상 물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호구가 되지 않는 지혜를 갖추는 것? 그런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아무튼 아버지가 물려주시고 싶으셨던 세진모터스는 회계상의 가치 그 이상의 것, ‘세상 물정 모르는 딸내미에게 세상 물정을 가르쳐 줄 학교’ 였던 것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온 지금 분명하다.
내가 세진모터스에서 대표이사로 일하지 않았으면 평생 법원이라는 곳에 갈 일이 있을까 싶으니까 말이다.
앞장에서 언급했던 유 이사와의 신경전… 나는 직원들의 장난질을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의심하고 잡아내어야 했다. 그 와중에서 직원들의 심증에 기대어 페인트 가게인 00 상사와 유 이사와의 모종의 커넥션을 잡아내고자 했다.
00 상사가 유 이사가 들어온 이후부터 페인트 가격을 몰래 올려 받았다고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00 상사의 사장과 유 이사와 각별한 사이인 점, 유 이사가 입사 후부터 이 업체로 거래처가 바뀐 점, 그 이후부터 슬쩍 페인트 가격을 올려 받았다는 점. 직원들은 일부러 내 귀에 들어가라고 이야기했는데, 한참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유 이사도 조금 억울했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유 이사가 뒷돈을 받았다는 물증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업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작은 것부터 파고드는 것 밖에 없었다. 내가 정비를 할 수 없고, 도장을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드라마에 보면 이런 상황에서 가녀린 여주인공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정비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드라마에서나 가능하고, 십수 년 도제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기술 습득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작은 일부터 파고들기로 했다. 그것이 그곳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중 00 상사의 페인트 가격이 이상하다면 그것을 파헤쳐 보기로 했다.
자동차에 사용되는 페인트는 수십 가지 종류가 있다. 각 차량에 맞는 색상도 가지가지이다 보니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다른 곳 보다 00 상사의 페인트 가격은 유난히 더 세분화되어있었다. 같은 코드의 색상이라도 몇 년식이냐에 따라 더 세분화한 후 가격을 조금씩 달리 받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애초에 전체 페인트 가격 리스트를 받은 후 납품할 때마다 전표와 가격을 일일이 확인했어야 하는데, 세진모터스는 그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00 상사의 페인트 가격 리스트를 요청하니, 거의 책 한 권 분량의 리스트가 왔다. 나는 지난 1년 치의 전표와 이 페인트 가격 리스트의 가격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맞추는 과정에서 정말 페인트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체를 엑셀로 정리해 원가격과 납품 가격을 대조해 보니 일부 페인트의 가격이 약 10% 정도 차이가 났다.
이 사안을 아버지(회장님)께 보고하였는데, 아버지는 별다른 액션을 취하시지 않으셨다.
대신 두 달치 납품대금을 입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두 달치 대금을 계속 입금하지 않으니, 그쪽에서는 애가 타기 시작했다. 찾아와서 사정도 하시고, 변명도 하시고, 협박도 하셨다.
나는 이미 수치로 결론이 나 있는 부분이니 그들이 더 받았던 만큼을 빼고 입금하면 되지 않겠느냐 했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항상 네게 말하지 않니. 카드는 쥐고 있어라! 처음부터 다 보여주면 나중에 보여줄 것이 없어!”
거의 반년 동안 00 상사에서는 우리에게 사과도 하면서 2달치를 입금해달라고 사정사정했으니, 어찌 보면 우리가 악덕업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 이 쓸데없는 공감능력……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내용증명이 날아왔다. 대금을 납품하지 않으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었다.
수년간을 이 업계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우리 아버지는 내용증명 따위는 눈 하나 꿈쩍 안 하셨다. 하지만 나는 어쩌란 말인가. 대표이사는 나고. 법적 책임은 내가 져야 하고, 모든 과정은 내가 짊어져야 하는데. 내용증명 하나만으로도 손이 벌벌 떨리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치는지……차라리 빨리 입금을 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버지는 더 완고하셨다.
“미리 나설 필요 없다니까. 일단 가만히 있어.”
그렇게 일단 내용증명을 파일 한구석에 미뤄놓고 애써 잊으려 했다. 그렇게 두 달 후, 법원에서 소액소송 판결에 관한 문서와, 가압류에 관한 문서가 날아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흔히 세진모터스 같은 자동차 정비공장에서는 보험사에서 받을 돈이 있는데, 그 돈을 압류시켜버린 것이다. 이런 일은 자동차 정비공장과 거래처 간에 비일비재하게 있는 일이긴 하지만, 평생 소송에 휘말릴 일이 있을까 싶었던 나에게 ‘소송’, ‘판결’, ‘가압류’와 같은 단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하고 뒤통수가 찌릿한 단어들이었다.
변론기일은 앞으로 한 달……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물론 내가 그동안 전수 조사한 페인트 가격 리스트가 있으니, 사실상 그들이 사기를 친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금액이란 것이 100만 원 정도의 금액이고, 우리가 대금으로 치러야 할 금액의 10%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100만 원 정도의 금액이 진짜 그들이 사기를 치려고 했던 금액이었을까?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일부 페인트 단가가 오른 것에 대해 미리 고지하지 못한 실수였을까? 점점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그들이 페인트값을 몰래 올렸다는 사실만은 가만히 두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름 변론을 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엑셀자료를 기반으로 여러 가지 증거를 붙여서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회장님은 반려하였다.
“항상 내가 이야기하는 게 뭐야. 카드를 먼저 내지 말아라.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다 보여주면, 나중에 보여줄 게 없다니까. 어차피 분쟁조정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든 중재해서 사건 종결하려고 할 테니까. 이런 구체적인 내용들은 다 빼.”
정말 그런 걸까? 내 마음 같아서는 모든 자료를 공개하고 투명하게 그들이 몰래 올려 받았던 페인트 가격만큼은 보상받고 싶은 것뿐인데, 나는 왜 끝까지 모른 척, 아닌 척, 질질 이 사안을 들고 있어야 하는 걸까? 매일 저녁 이 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나의 맷집을 키우려는 아버지의 계획인 것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과정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첫 법원 입성…
법원은 그 공간이 주는 기압 자체도 너무 무거웠다. 건물 특유의 콘크리트 바닥과, 회색 벽면이 주는 차가움은 단순히 그 건물이 오래되어서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분쟁조정실에서 만나게 될 00 상사의 대표이사와의 만남을 머릿속으로 수회 시뮬레이션하며 애써 긴장을 풀려고 하고 있었다. 00 상사의 실제 대표이사를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어쩐지 내 머릿속에는 사기꾼에 능글맞은 60대 여느 카센터 사장님의 이미지로 그려져 있었다. 어떻게 침착하게 그 능글맞은 사기꾼을 무찌를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은 꽉 차 있었다.
그때 분쟁조정실 안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사건번호였다. 애써 태연한 척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가운데 분쟁조정을 맡으신 사무관으로 보이는 분과, 왼편에는 00 상사의 대표이사가 앉아있었다.
00 상사의 대표이사는 내가 알고 있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동안 세진 모터스에 찾아와 대금을 입금해 달라고 했던 키가 멀쑥하고,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고, 능글맞은 이미지의 사람은 대표이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00 상사의 바지사장이었던 것이고, 실제 대표이사는 훨씬 깔끔하고 단정한 이미지의 사람이었다. 말쑥하고 단단해 보이는 얼굴은 오히려 성실한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깔끔한 면바지에 하늘색 골프티셔츠는 사기꾼 이미지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이 사람이 정말 사기를 칠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지에서 물러나서는 안된다. 오늘 어떻게든 나는 이들의 사기행각에 대해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저희가 올해 3월과 4월에 1135만 원어치의 페인트를 납품했는데,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주지 않고 있습니다. 몇 번이고 찾아가서 달라고 사정을 해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
00 상사의 대표이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마도 이분은 그간의 사정에 대해 소상히는 모르는 듯 보였다. 그저 보고받은 대로 세진모터스는 두 달치 납품대금을 입금하지 않는 악덕기업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00 상사의 대표이사도 나를 보고는 조금 놀라면서 기운이 빠지는 눈치이긴 했다. 그 역시 세진모터스 회장님인 우리 아버지를 대표이사로 알고 있었을 테고(나와 아버지는 각자대표였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70을 바라보는 고집스러운 노인네를 상상하면서 법원에 왔을 테니까…….
분쟁조정 담당 사무관님은 나와 00상사의 대표이사를 번갈아 가면서 뻔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조금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나의 호구적인 이미지가 크게 장점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래요, 세진모터스의 오영주 대표이사님, 이에 대해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나는 ‘흥분하면 안 된다.’를 수차례 되뇌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그 금액을 안 주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작년에 납품 받았던 페인트 가격이 고지 없이 인상되었고, 저희는 이 사안을 명백한 사기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지만, 저희에게 고지했다고만 이야기할 뿐 이를 증빙할 만한 자료나, 애초에 페인트 가격 리스트조차 없었습니다. 저희는 정확한 페인트 가격 리스트를 수차례 요구하였지만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뒤늦게 받은 페인트 가격 리스트에 쓰여있는 가격이 저희에게 납품했던 전표와 다량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박하며 페인트 가격을 몰래 올려 받는 것이 아닌지 해명을 요구하니, 해명이나, 사과 없이 페인트 가격 리스트가 잘못된 것이었다면서 다른 리스트를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가격이 조금씩 달랐고,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페인트 가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정확한 가격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는 페인트 대금을 납품할 수 없으니, 정확한 가격을 알려달라고 재차 요구한 것인데, 페인트 대금 입금만을 요청하고 있어 저희도 답답한 상황입니다.”
나의 이 해명이 끝나자 그쪽에서도 답답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저희가 페인트 가격이 인상되었다고 고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지를 못 받았다고 하시네요.”
나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아니 그러면 애초에 왜 페인트 가격 리스트는 없는 거며, 나중에 보내주신 가격 리스트의 가격들이 다 제각각인 거죠?”
그는 살짝 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그건 담당자의 실수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사안에 대해서는 그 사안에 대해 따로 논할 일이지, 두 달치 페인트 값은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물러설 수 없는 나도 지지 않았다.
“두 달치 페인트 값도 그 가격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말대로 나는 그들이 준 리스트의 페인트 가격과 우리에게 납품한 가격과의 차액, 그리고 그들이 준 각각의 리스트의 가격차이 등 세세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은 채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가르침대로 나는 ‘나의 카드를 먼저 다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대화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이미 마음속에서 논리적으로 설득당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그의 말대로 납품대금과 그들의 페인트값 장난질은 별개의 일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질 수는 없었다. 나는 결국 흥분한 상태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사장님이야 이 업계에서 닳고 닳으셨으니 그런 식으로 페인트값 장난치시고도 당당하게, 납품대금을 달라고 하시나 본데요!”
이 부분에서 그도 발끈했다.
“아니, 뭐라고요?”
우리 둘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사무관은 나를 향해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지금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시면 안 됩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나의 최대 무기인 호구적인 인상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분에게 잘 보여야 해!!!
그리고는 나는 그 사무관에게 크게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페인트값을 사기당했다 생각해서 너무 억울해서요…… 돈은 돈대로 줘야 하고, 사기당한 것에 대해서는 따로 소송이라도 해야 한다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저는 경험도 없고…”
역시, 나에게는 이 컨셉이 가장 맞나 보다. 사무관은 내가 꾀 측은해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상대방 조차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너랑 뭘 더 싸우겠냐…’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 자… 이 자리는 민사소송으로 넘어가기 전에, 원만하게 당사자들끼리 협의를 해서 사건을 종결하자는 취지에서 있는 절차입니다. 제가 두 분 이야기를 들어보니, 00 상사는 두 달치 페인트값만 받기를 원하는 것 같고, 또 세진모터스는 그전에 지불했던 페인트 가격이 너무 비쌌다는 이야기 같아요. 실제 가격보다 비싸게 그동안 페인트를 사 왔고, 00 상사는 이를 미리 고지했다고 주장하고, 세진모터스는 미리 고지받지 못했다는 주장 같아요…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지금 내야 할 페인트값의 10% 정도 낮은 가격으로 합의를 하면 어떻겠습니다. 그 정도면 세진모터스에서 보았을 손해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사무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10%의 할인율은 내가 그동안 조사했던 페인트 가격의 차액이랑 거의 비슷했고,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겨우 나의 불쌍해 보이는 모드로 분위기를 전환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싸움을 끌고 싶지 않았다. 이 긴장감 흐르는 답답한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00 상사의 대표 역시 이 어린 여자애랑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 역시 이쪽이 훨씬 이익이라고 생각했는지 먼저 대답을 꺼냈다.
“네, 저희도 일부 실무자의 실수로 이렇게 된 것을 인정하니, 납품대금의 10% 제한 나머지만 입금해도 소를 취하하겠습니다. “
사무관은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네, 그 정도면 올려 받은 페인트 가격과 원래 가격의 차액과 비슷하니, 저희도 그러면 그렇게 합의하겠습니다. “
사무관은 이야기가 잘 끝나니 두 사람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처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네, 그럼 1135만원의 10%를 제외한 10,2150,00원을 00 상사의 계좌로 입금하시고, 언제까지 입금 가능하시죠? 이번 달 안으로는 가능하신 거죠?”
“네, 가능합니다. “
“네, 그럼 9월 17일까지 입금하시는 것으로 조정합니다. “
그런데, 이대로 끝나는 것이 뭔가 불안한 나는 소심하게 물었다.
“저…… 그럼……”
“질문 있으신가요?”
“혹시 가압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 가압류는 입금하자마자 풀립니다. “
“네… 그럼 소송비는……”
“아, 그건 원고 측의 부담입니다. “
휴……뭔가 마음속에서 큰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거면 되었다.
“자, 그럼 201호로 가셔서, 판사님 앞에서 판결 확정 지으시면 됩니다. “
사실 이때까지 나는 저 사무관이 판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노련한 분은 판사는 아니셨고, 실제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는 결재만 하는 분으로 따로 계셨다.
00 상사의 대표님과 묵묵히 201호실을 향했다. 201호실에는 젊고 키가 큰 판사님이 계셨다. 드라마에서 보았던 판사 이미지와는 정 반대였다. 게다가 판사실도 그냥 작은 사무실 같았다. 젊고 키가 큰 판사님은 판결문을 읽으시더니 상냥한 목소리로 웃으며 이야기하셨다.
“그럼, 00 상사와 세진 모터스 양쪽 다 합의하신 겁니까?”
“네, 합의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
“그럼 여기에 각각 직인을 찍어주시고요.”
그리고 끝이었다.
끝? 이게 끝이라고? 뭐야, 생각보다 너무 간단하잖아!!! 나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법정 같은걸 상상했었다. 상대측은 변호사를 통해 소송을 한 것으로 알았는데, 그날 변호사는 보이지도 않았고, 분쟁조정실은 조그만 골방 같았으며, 판사는 사무적으로 그날 우리의 합의서에 도장만 받았다. 소송은 아예 가보지도 못하고 끝났지만 거기까지의 과정만으로도 나의 긴장감은 척추를 꼬집는 것 같았다. 그 긴장감이 판사님의 마지막 판결문 낭독으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마음이 가벼워진 나는 상대 대표이사도 달라 보였다. 어쩐지 이 사람도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쓸데없는 공감능력이 다시 생겨났다.
아무튼 나도 사기당했다고 믿고 있었던 페인트값만큼을 뺀 나머지 금액으로 정산하게 되었으니 마음이 후련하였고, 그분도 대금의 10%만 할인한 채로 물건값을 받게 되었으니 서로 손해는 아니었다.
00 상사의 대표와 같이 탄 엘리베이터에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고 그는 말했다.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이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을… 저도 사업체가 여러 개라 세심하게 들여보지 못했었네요. 아무튼 앞으로는 잘 부탁드립니다. “
“아, 네. 저도 아버지 사업체를 처음 운영하다 보니 사실 관리를 제대로 못했던 부분도 있었네요.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법원을 나오는 발걸음이 한걸음 가벼워졌다. 이렇게 나의 법원 입성기가 끝나는구나……
나는 들뜬 마음으로 회장님 (우리 아버지) 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두 회사 간의 오해를 풀고 납품대금의 10%를 뺀 나머지만 입금하기로 한 것을 설명드렸다.
소송까지 가지 않고, 손해도 보지 않게 결과적으로 잘 끝난 것 같아 나름 스스로 잘했다고 뿌듯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그 뿌듯함에 제동을 걸었다.
“아니, 그럼 10%만 빼고 주기로 했단 말이야?? 왜 10% 했어! 20% 해야지!!!!!! “
엥??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전수 조사했던 페인트값의 차액이 10% 정도였는데……
“어차피 우리가 손해 본 정도가 그 정도 금액이에요. 괜히 싸움이 커져서 증빙자료 제출하라고 하면 바로 탄로 날 수 있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일단은 20% 밀어붙여야지… 우리 딸 정말 언제 세상 물정을 좀 알까……”
하아… 그놈의 세상 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