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은 누구나 계획하지 않은 삶을 살기도 한다.
1-1. 40대의 엄친아, 엄친딸은 누구인가?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 되던가요?”
그렇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에 있어서 계획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계획이 있어야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더 많은 선택지를 갖고 안전하게 길을 찾아 나갈 수 있다. 나는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꽤 일찍 알았다. 늘 나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의 계획으로 인해 스펙터클한 삶을 살아와서 그런가 보다. 그렇게 주어진 삶을 뚜벅뚜벅 걸어온 지난날들이 갑자기 왜 이렇게 허무하게만 느껴지는 건지… 나이 40에 아직도 엄친아, 엄친딸의 이야기 들으며 낮은 자존감을 갖고 살게 될 줄이야.
10대 때의 엄친아, 엄친딸들은 그저 전교 1등, 공부 잘하는 아이. 이 타이틀이 전부였다.
20대에 들어 이들은 명문대 타이틀을 얻는다. (만약 전문직에 관련한 학과를 들어간다면 덤이다.)
20대 중반, 서서히 이들의 대기업 입사 소식이 들린다.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대기업. 그리고 그들의 서열은 명백한 수치로 매겨진다. 바로 연봉!
30대 초반, 이들의 성공 여부는 다시 미혼과 기혼으로 나뉜다. 그들 스스로만큼 조건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에 성공하면 이제 다 이룬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다시 자녀의 유무로 이들의 성패는 갈리게 되고, 엄친딸의 경우는 자신의 직업적인 전문성과 경제력을 겸비한 채 자녀를 갖느냐, 전업으로 사느냐에 따라 다시 갈린다. 그리고, 이만하면 다 갖춘 것 같은데, 이만하면 끝난 것 같은데, 결국 부동산을 소유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다시 성패가 갈린다. 그 부동산이 강남에 있는 아파트 한 채라면 정말 다 이룬 것 같다.
나는 일찌감치 그들(누구인지 명확하게 지칭할 수는 없지만, 우리를 달리게 하는 어떤 세력)의 보이지 않는 계략이 몹시 불편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토록 현실도피를 시도했었고, 지금도 시도하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돌고도는 과부하와 리셋 버튼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막연히 높이 더 높은 곳으로 서로를 밟고 올라가는 애벌레들이 묘사된다. 정작 꼭대기에 올랐을 때는 아무것도 없고, 다시 떨어질 일만 남아있지만 이를 모른 채 무작정 애벌레들은 꼭대기를 향해 기어 올라간다. 그중 한 애벌레, 노란색 애벌레는 이러한 현상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내가 꼭 그 노란색 애벌레 같았다. 무엇이 나로 그리 생각하게 하였는지 돌이켜보면,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배웠던 하나님이 일찌감치 그렇게 가르쳐 주셨던 것 같다. 엄친아, 엄친딸을 만드는 기준으로 줄 세우기 하는 학교에서 무작정 뛰쳐나가고 싶었다. 성적뿐이 아니라 잘난 외모, 유행에 민감한 세련미, 부모의 재력과 지위 등에 따라 미묘하게 태도가 달랐던 선생님들, 부모, 아이들...... 그 틈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면 그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뀔 것만 같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영국에 계시는 이모집에 나를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나 무모했던 생각인데, 어린 나의 마음에서 이미 이 무한경쟁의 굴레가 진절머리 나게 싫었던 것 같다. 막연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떠나면 모든 것이 리셋될 것 같은 생각이 그 어린 나이부터 들었던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의 훌륭한 점은 이런 철없는 사춘기 여학생의 즉흥적일지 모르는 그 요구를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중2의 나이에 홀로 영국의 기숙사 학교에 들어갔다. 근처에 계시는 이모님의 도움으로 낯선 땅에서 적응하면서 나는 인생이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또래의 친구들보다 조금 빨리 깨닫게 된 것 같다.
나의 막연한 기대에 부흥하듯이, 그곳에서는 누구나가 이야기하는 무한경쟁의 둘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고도, 나의 노력만으로 성적이 향상되는 기쁨을 누려볼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사교육 위주의 입시교육에서는 얻기 힘든 자신감이었다. 이것이 바로 첫 리셋 버튼으로 얻은 성과였다. 그렇게 2년을 그곳에서 적응하던 중,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 첫 번째 챕터 IMF 외환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영국에 갔을 때 파운드 환율은 1300원~1500원 정도였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 파운드는 4000원까지도 치솟았으니 안 그래도 어려운 살림을 딸 유학비에 쏟아붓고 계셨던 부모님은 더 이상 지원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제 겨우 영국에서 적응하고, 그곳에서 학업 우수상도 받고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에 대해 조금은 내가 성실히 해낸 만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 시작할 즈음, 나는 다시 돌아와야 했다. 방학 때 한국에 돌아온 나는 다시는 영국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 고등학교에 다시 들어와 입시지옥에 들어온 나는 줄 세우기 식 무한 경쟁의 굴레에서 뛰기 시작했다.
세월이 2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참 의아한 한 가지는 왜 한국에만 있으면 나는 이렇게 한없이 초라해지고, 막연한 불안감에 무엇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마음이 붕 뜨게 되는지 이다.
어느 벽을 넘지 못하는 수능 모의고사 성적에 늘 불안에 떨며 모의고사 문제집을 닥치는 대로 풀었던 10대의 나의 모습이, 40대가 된 지금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불안함으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대며 무엇인가 모르게 바쁘게 살고 있는 나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늘 엄친딸과 엄친아들은 나의 불안감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대학에 입학을 하면 그래도 무언가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던 허상은 이내 더 큰 불안감으로 증식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잃어간 채 학점, 동아리 활동, 인맥 쌓기, 등등의 스펙을 쌓아가는 것이 전부인 것 같은 대학생활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꿈이었던 나는 적어도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 하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주어진 과제의 틀 안에서 친구와 경쟁하는 하루하루가 더해질수록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이 안개처럼 나를 뒤덮었다. 무엇을 위한 스펙 쌓기인가… 결국은 더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질문에 대한 답에 도달할 때, 이 길을 끊어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나는 리셋 버튼을 또다시 누르게 되었다. 이번에는 23의 나이에 일본으로 간 것.
참으로 신기하다. 제 아무리 다른 나라라 해도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인데 경쟁이 없을 수 없고, 치열함이 없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를 벗어날 때만 느낄 수 있는 여유의 맛이 있다. 물론 유학생활은 늘 그렇지만 외롭고, 힘들고, 불편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힘듬이 오롯이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적인 힘듬이 아니라 내가 조금씩 쌓여가는 보람 있는 힘듬이다. 그것이 내가 끊임없이 이 나라에서 도망가려는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일본의 미술대학 예술문화학과에 편입한 후 예술을 활용한 다양한 활동의 기획, 평론 등 재미를 붙이게 되고, 일본 생활에도 큰 재미를 느끼고 있을 즈음, 계속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나에게 부모님은 돌아오도록 명령하였다. 대학 졸업 후에는 취업을 해서 경제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부모님의 지론이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에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는 충당했지만, 부모님의 도움이 없이는 대학 졸업은 힘들었을 것 같다. 일본에 계속 남기 위해 일본 내 취업을 노력했지만, 비자 문제로 번번이 낙마했다. 그 와중에 대학 내의 한국인 교수님의 소개로 파주의 한 미술관에서 취업이 결정되었다. 나는 돈이나, 회사 이름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아트 디렉터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둘도 보지 않고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의 나의 나이는 26. 열정 페이가 당연시되었던 시절이기도 하고, 적은 급여는 괜찮다고 막연히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든지 경력을 쌓으면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밤새 전시 준비도 하고, 허드렛일도 닥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런 나의 순수한 열정을 바꿔버린 것은 친구들의 오지랖이었다. 이것이 한국에 있어서 그런 것이었을지. 정말 이곳이 문제인 것인지, 이 물음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무튼 친구들은 나의 이곳에서의 열정을 낮은 연봉과 낮은 네임밸류로 저평가하였다.
“어머, 연봉이 너무 말이 안 되는데?”
“주 6일 근무라고? 그럼 언제 쉬어?”
“헤이리의 00 미술관이라고? 처음 들어보는데?”
일본에 유학 다녀와서 고작 다니는 직장이 이름도 처음 들어본 작은 미술관에 연봉을 최저임금보다 낮은… 걱정을 가장한 묘한 비웃음 같은 것을 느꼈다면 나 역시 은연중에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나는 해당 미술관을 나와 공기업에 입사했다.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공기업이기도 했고, 또 내가 원하는 예술기획 분야의 일이었기에 이곳에 입사한 후에는 나름은 친구들에게도 떳떳하게 내가 어느 회사에 다닌다고 이야기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도 회사라는 곳은 더더욱 치열한 무한경쟁 속에 던져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다시금 해외도피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어 했다. 물론 내가 일했던 곳은 여느 대기업의 치열함에 비할 곳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내 정치, 실적, 성과를 내기 위해 나의 알량한 꿈 따위는 버려야 한다는 것은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때만 되면 도피하고 싶어 하는 나를 보면 무한 경쟁사회에 순응하며 그에 부흥하며 열심히 살다가도,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늘 묻고 반항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해외도피 리셋 버튼 그 세 번째로 KOICA 해외봉사단에 지원해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캄보디아에 갈 수 있게 된 나는 최종 합격 후 부모님을 설득시키는 숙제를 앞두고 있었다.
중학생 때 영국에 갈 때도, 다니던 대학을 때려치우고 일본에 간다고 할 때도 늘 흔쾌히 딸의 결정을 믿어주었던 부모님이다. 그러나 이 건은 성격이 달랐다. 20대 후반의 딸이 그 나이에 해외를 나가면 결혼과는 멀어진다는 것도 불 보듯 뻔했다. 그 당시만 해도 혼기를 놓진 다는 것은 나이가 찬 딸을 둔 부모님에게는 큰 불안 요소였다(고작 10년 전의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습관처럼 국내에서 힘들다는 생각만 들면 해외로 도피하려는 딸의 해외도피 증후군을 이제는 두고 볼 수가 없으셨을 것이다. 이때의 우리 부모님의 묘책은 가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마침 결혼 적령기의 내가 외로움을 쉬이 잘 탄다는 것을 아시고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셨다. 이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는 “여자고 남자고 때 놓지면 결혼하기 힘들어”였다. 그 이야기에 세뇌가 된 나는 캄보디아로의 도피를 꿈꾸면서도 인생의 큰 숙제인 결혼을 놓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리고 “인생 참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의 연속 시리즈로 그해 나는 캄보디아 행을 포기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그렇게 기약 없이 항구에 정박한 배 같이 고이 묶이게 된 나는 그 이후로도 쭈욱 한국에 착하게 정착하고 있다.
여기까지 나의 삶을 축약해 놓으니 그토록 경쟁도 싫고,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걸 싫어하면서, 가장 착실하게 인생의 숙제들을 제때제때 해왔던 것 같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이 정도 인생의 숙제들을 차곡차곡 클리어했으면, 이제 그 숙제들은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인생의 숙제는 끝이 없다. 결혼 후에는 출산, 양육 그리고 부의 축적……. 그리고 그 숙제들을 더 착실히 한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는 끊임없이 나의 인생에 대조되어 나를 경쟁선 상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와서 고치를 만들어야 한다.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 모두가 너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거란다."
이제는 그 엄친아, 엄친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이것이 나만이 갖고 있는 갈증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왜 우리는 인생의 숙제를 끌어안고 불안에 떨면서 살아야 하는가. 늘 반문하면서도 따라가고 있는 나의 인생이 아이를 낳은 후, 아이를 키우면서 더욱 철저히 수동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주체적인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온데간데없고,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삶. 철저히 수동적인 삶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다음 장에서는 참으로 뻔하게 들릴지 모르는 어느 경력단절 여성의 이야기를 조금 해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