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면교사

by 키리카

1-2. 나의 반면교사


출산 후 철저히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된 나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어떻게 이 수동적인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옳은 일인가에 대해 질문을 안겨준 나의 사촌언니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고 싶다. 글에 앞서 내가 그 사촌언니의 일생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는 점, 그래서 다소 사실관계와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살짝의 픽션을 가미해 그녀의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그녀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은 언니다. 언니는 그 유명한 이화여자대학교를 나왔다. 언니가 20대 때만 해도 이대 출신의 여성은 맞선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가치가 메겨졌다. 선시장 이라는 표현은 요즘 여성들이 들으면 매우 불쾌한 표현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렇게 표현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좋은 혼처에 시집가는 것은 큰 복으로 여겨졌었다. 그 언니가 26살이라는 너무나 꽃다운 나이에 서울대 의대생이랑 결혼했으니, 정석대로 좋은 혼처에 시집을 간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언니의 삶은 그저 아름다워 보였다. 똑똑한 남편, 그에 걸맞은 우아한 외모와 고상한 지식의 겸비, 아들 둘 딸 하나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은 그런 언니의 삶이 마냥 행복해 보이지 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종종 나를 포함한 사촌동생들에게 “너는 결혼해도 꼭 일을 그만두지 마.”라고 이야기했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만해도 언니와 10년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남편의 실력과 경제력에 기댄 삶은 전혀 주체적이지 않아 보였고, 멋없는 삶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20대 미혼이었으니, 나는 언니처럼은 살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왠지 나는 일도 출산도 육아도 스스로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실력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른 경로로 들은 이야기지만, 언니는 결혼 내내 남편에게 무시를 받았다고 한다.

“너는 내가 벌어다 주는 돈 쓸 줄만 알지!”

그 말이 얼마나 상처였을까? 후에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언니가 아이 셋을 키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마음은 경건해졌다. 그만큼 육아라는 것은 그 혹독함에 비해, 그 누구에게도 그 공을 인정받기 힘든 노동 그 이상의 것이다. 언니 역시 언니만의 커리어를 왜 갖고 싶지 않았을까? 그런 궁금증들은 바로 나의 결혼생활과 동시에 금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일도, 실력도, 출산도, 육아도 스스로 훌륭하게 라는 말은 무지 그 자체였다. 아이는 내가 키우지 않으면 누군가가 키워야만 자랄 수 있다. 만약 내가 일과 실력에 집중한다면, 그동안 내 아이를 누군가가 (그것이 부모님이든, 시터든, 어린이집 선생님이든) 공들여 키워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팩트이다.


나는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는 1년 동안 복직을 위해 시터든, 어린이집이든 아이를 대신 키워줄 누군가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그런데 나의 답은 “엄마보다 더 잘 키울 수 있는 양육자는 없다.”였다. 이 말에 꼭 공감하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것은 나의 답이었고, 나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후회는 없다. 지금도 맘까페에는 이런 질문들이 무수히 올라온다.

“직장 때문에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려고 하는데, 얼마 정도 드리면 좋을까요?”

“시터 시급 시세가 어떻게 되나요?”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있는 아이 모습이 너무 짠합니다.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전업으로 바꾼 지 한 달째인데 너무 우울해요. 아이 보는 것도 지치고, 제가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 같아요.”

전혀 다른 내용의 질문들 같지만 육아와 자신의 커리어를 놓치고 싶지 않은 엄마들의 눈물겨운 고민이라는 점은 모두 공통적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육아와 일을 혼자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다는 팩트에 따른 고민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 나는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은 독립적인 성인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시터든 어린이집이든 남에 손에도 맡기지 않겠다고 했다. 또한 어떻게든 혼자서 이 모든 것을 다 해보리라 했지만, 결론만 말하면 ‘이도 저도 않는 어정쩡한 삶이 되어버렸다.’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삶을 후회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몇 년간 보게 되었는데, 아이가 친구 엄마는 돈 벌어 오는데 엄마는 왜 집에서 놀아?라는 말을 들으면 자괴감이 듭니다..”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나는 꼭 이렇게 답해주곤 한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생각보다는 나를 위해서 한 결정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은 많이 힘드시겠지만, 아이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그 아이의 소중한 시절을 엄마가 함께 했다는 것은 엄마에게 보물입니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나 역시 안정된 공기업을 버리고 아이 둘을 키우면서 후회와 괴로움으로 고민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약 그 회사 계속 다니고 아이들을 키웠다면, 아이들과 고군분투했던 그 시간을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첫아이 출산 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아직도 아이들의 한 살 두 살 때의 사진을 넘겨다보며 미소 짓는다. 아이들의 잠든 모습을 보면 그때 그 아기 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그 기억들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말 그대로 치열한 전쟁이었다. 잘 자지 않는 아이를 재우겠다고 등에 업고 동네를 두 바퀴 정도 돌았던 적도 있고, 아이들과 요리활동을 해보겠다고 온 집안을 밀가루로 도배한 적도 있다. 아이들이 온 집안을 들쑤시고 숨바꼭질을 한 날은 이삿날처럼 온 집안에 초토화된 적도 있다. 물론 일하는 엄마들에게도 아이들과의 추억이 많을 것이지만, 양적인 면에서 전업일 경우 확연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그것들은 휴대폰, 클라우드에 반짝반짝 보물처럼 저장되어있다.


이때부터 철저히 수동적인 삶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육아휴직을 마칠 때 퇴사를 하겠다고 결심한 계기도 어쩌면 주체적인 선택이 아닌 수동적인 삶의 시작을 알리는 어떤 이끄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 그것은 분명 나의 삶을 계획하는 커다란 주체가 이미 나를 만들었고,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육아휴직 말미에 회사로 복귀할 것인지, 아이를 키울 것인지 결정하는 그 과정에도 나를 이끄시는 주체의 자연스러운 이끄심이 있었다. 많은 엄마들이 전업맘이 될지, 워킹맘이 될지 고민한다. 나는 이것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 전업맘과 워킹맘을 나누는 기준도 너무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과 형태가 있고, 전업맘이라고 해서 일을 하지 않는 엄마는 없기 때문이다. 그냥 모두 어머니 일 뿐이다. 각자의 성향, 각자의 상황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고, 나는 단지 그 모든 상황 가운데에 퇴사를 선택했을 뿐이다.


물론 현실의 나의 육아 라이프는 내가 주장하는 이론처럼 아름답게 전개되지는 않았다.

이 과정 속에서도 나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내려쳐졌다.

사촌언니가 “너는 결혼해도 꼭 일을 그만두지 마!”라고 했던 말이 얼마나 사무치게 와닿았는지…….

우선 육아 자체의 힘듦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아무도 가르쳐 줬던 사람이 없는 거야? 왜 닥치면 다 한다는 식으로 육아의 본질에 대해 꽁꽁 숨겨왔던 것인지…. 게다가 살림은 또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그 이전까지 내가 내어 달렸던 공부, 취업 그 모든 것이 왜 다 헛수고처럼 여겨지는지……. 나는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라는 어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업=노는엄마 공식으로 쳐다보는 시선…


그날도 어느 때처럼 몸도 마음도 육아로 지쳐있었다. 육아로 인한 우울감이 장기화되었을 때 즈음, “회사 그만두지 말걸 그랬어. 차라리 누구한테 맡겨놓고 일하러 나가고 싶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이 다 부정당하는 것 같고, 다른 친구들은 성장해 가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

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그때 남편이 위로랍시고 한 이야기가 오히려 나를 건드렸다. 그간 꾹꾹 괜찮다고 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냥 회사 다니지 말고 편하게 놀아. 그래도 내가 회사에서 버는 정도면 먹고사는데 큰 지장 없어. 우리 회사 부장님들 와이프들 다 집에서 놀아.”

남편이 나를 사랑해서 위로해주려고 애쓴 말에 깔려있는 사상 자체가 전업=노는 엄마 라니……. 그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펑펑 울었다. 남편의 잘못도 아니었다. 대외적인 직업을 가지지 않는 엄마에 대한 혹독한 사회적 편견에 한 대 맞은 날이었다.


문제는 남편에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여자끼리의 편견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어느새 워킹맘 전업맘이라는 구도로 같은 여자들끼리도 빈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프롤로그에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 어머니는 가사를 일으키기 위해 보험설계사부터 시작해 자동차 용품 판매,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였다. 내가 봐도 우리 어머니는 여자이면서 집안 살림도, 사업도 모두 잘하는 멋있는 엄마였다. 그 시절만 해도 일하는 여자들이 많지 않은 시대였는데, 엄마는 그래서인지 친구들과 만나고 돌아오면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했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친구들은 조금 답답해. 대화도 어렵고.”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에게는 집안 살림만 하는 여자가 되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반대로 엄마의 부재가 늘 아쉬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아이들의 곁을 지켜주는 엄마도 되고 싶었다.


이런 두 가지 반대되는 마음이 공존하다 보니, 늘 마음이 갈팡질팡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세진모터스를 물려주고자 작정을 하셨다. 단순히 부를 물려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일하는 딸, 경제력 있는 딸, 당당한 딸로 만들고 싶으셨던 것이다. 늘 입버릇처럼 하시던 아버지의 말 “우리 딸이 세상 물정을 알아야지.”는 그 목적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줄 것 같다. 부모님 세대조차도 집에서 아이 키우고 살림만 하는 것은 세상 물정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조급해졌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즈음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아니, 합격이 되더라도 아이를 보면서 기업에 출퇴는 한다는 건 내 한계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일도, 육아도 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세진모터스’밖에 없어 보였다.


부모님은 육아에 전념하느라 백수가 된 딸을 구제하기 위해 열심히 나를 세진모터스에서 일하도록 설득하셨다. 그리고 현실을 깨닫도록 종용하셨다.

“남자 혼자 벌어서 언제 대출갚고 집살래?”

“니 나이에 너가 하고싶은 일을 하겠다니, 언제까지 꿈만 꾸고 있을래? 우리딸은 참 현실감각이 없구나.”

“아이들 삼년정도 키웠으면 다 키운거야, 이제는 다른데 맡기고 너도 일을 해야지!”


그러나 부모님의 그런 딸을 위한 측은지심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배부른 소리라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저 회사를 그만둔 내 선택이 노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받고 싶었을 뿐이다. 남편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세진모터스에 입성 후의 심정의 변화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다시 나의 반면교사, 이번장 초입에 언급했던 사촌언니의 이야기로 돌아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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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세진 모터스의 대표이사로 일한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 사촌언니의 남편, 즉 나에게는 사촌형부의 부고 소식이 들렸다. 친척들 모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사촌언니의 나이는 막 50이 되기 시작할 때였고, 형부의 나이 역시 5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그 나이만으로도 충격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형부는 서울대학교 의대 출신의 의사였다. 그간 친척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굉장히 고지식한 성격으로 매우 신임을 받는 의사였지만, 돈은 잘 벌지 못했다고 한다. 10년 전에 천안에 병원을 개원했는데, 진심으로 환자들을 돌보았지만, 불필요한 시술, 검사를 전혀 권하지 않아 병원이 늘 적자에 시달렸었다고 한다. 그런 스트레스로 돌아가시기 3년 전 후두암이 발견되었고, 투병 끝에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언니는 현실에 부딪혀야만 했다. 아이 셋을 키워왔던 언니 역시 사회생활로 돌아오기란 너무 막막한 일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를 나온 언니였어도 20년간 회사 일을 경험해 본 적은 없으니까…….

우리 부모님의 측은지심은 이 언니에게도 작동하였다. 50에 아이 셋을 키워야 하는 미망인이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에 부딪혔으니 삼촌, 숙모로써 도움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언니가 이화여자대학교를 나왔으니, 어떤 일을 맡겨도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우리 회사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 역시 컸을 것이다.


그렇게 언니는 세진모터스의 일원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어색했지만 나는 대표이사로, 언니는 과장으로 한 공간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자신의 학벌, 의사의 아내였던 신분을 철저히 내려놓기로 결심하고 세진모터스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언니는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세진모터스와의 묘한 이질감, 그것이 무엇인지 참 신경이 쓰였다.


언니와의 일하는 하루하루의 시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며 언니의 말,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내가 세진모터스에 출근하시 시작했던 몇 달간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촌언니의 말과 행동에서 오는 불편함은 비단 언니가 오랜 시간 가정주부여서, 사회 물을 먹지 않아서 생긴 미숙함 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주어진 삶을 오롯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누구나가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우선 분명히 해둘 것은 이번 장에서 언니가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시간을 ‘전업=노는 엄마’의 시선으로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 육아를 전념하면서 긴긴 전업주부의 시간을 보냈고, 그 가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글이 전업맘 대 워킹맘이라는 단순 한 구조로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남편의 사망 후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세진모터스로 입사하게 된 사촌언니는 언니는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예쁠 때에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 아이를 셋이나 키우고, 의사 남편을 내조해 왔으니 사회생활을 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니는 그 삶 자체만으로도 큰 일을 해낸 것이다. 언니가 하루아침에 미망인이 되어 그간의 삶을 부정당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언니는 세진모터스에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언니의 열심히 더해질수록 언니의 내면과 현실과의 괴리가 더욱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세진모터스에 출근하기 시작한 몇 달간의 나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그토록 외치던 “우리 딸이 세상 물정 좀 알아야지”라는 말이 와닿기 시작했다.


언니의 말과 행동에서 볼 수 있었던 내면과 현실의 괴리는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 번째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었다.

매우 겸손해 보이는 것 같은 행동은 자신의 신분과, 학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픈 욕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테면 청소든 뭐든 허드렛일이 생기면 “내가 할게”라고 이야기하면서 “내가 우리 남편 병원에서 청소할 때는…….”이라는 이야기가 따라붙을 때면 의사의 아내였다는 본인의 신분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잊지 않도록 하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남편에게 무시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남편의 신분과 동일시함으로 자존심을 지켜왔다니……아무튼 언니는 가끔 듣기 거북할 정도로 “우리 남편 병원에서는……”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이것은 언니의 모습만은 아니었다. 요즘 세대(MZ세대라 해야 하냐?) 많이 분위기가 바뀌긴 했지만, 언니 또래의 많은 주부들 가운데 남편이 고위직인 경우, 남편의 지위로 자신의 노력을 보상받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집에서 자녀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헌신한 보상을 자신의 사회적 지위로 보상받지 못하니, 자녀의 성공, 남편의 신분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성공하는 남편들은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왜 그녀들은 굳이 자신의 헌신을 남편의 지위나 자녀의 성공으로 보상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단순히 사회적으로 노는 엄마라는 프레임이 억울해서? 물론 그렇다. 억울할 것이다. 이 글 초입에도 언급했지만 전문직, 고위직 남편을 만날 수 있는 여성은 그에 걸맞은 학벌을 겸비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여성들은 결혼 전에는 자신의 학벌과 지위만으로도 사회적 신분을 나타낼 수 있었지만, 내조에 전념하게 되면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사라지게 된다. 결국 남편, 자녀가 자신의 업적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고 싶어 한다.


나 역시도 은연중에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을 세진모터스 입사 초기에 드러냈던 것 같다. 마치 ‘나는 너희들과는 달라’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처럼…….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세진모터스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왜 많은 여성들이 집에서 열심히 아이들 키우고 집안일을 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남편을 내세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니 문득 서글퍼졌다. 여자들은 왜 온전히 자신의 업적에 대해 스스로 당당할 수 없는 것인지…… 그것이 집안일이든, 집 바깥의 일이든 말이다.


두 번째는 무능이었다.

솔직히 언니는 무능했다. 언니가 대학 졸업하고 얼마 안 되어 결혼을 하였으니 회사에서 일한 경험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엑셀, 한글 다루는 것이 미숙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회사라는 시스템에 대한 개념 자체가 전무했다. 물론 언니는 열심히 노력했다. 타자가 느린 것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타자연습도 했고, 자동차 부품 종류와 가격을 외우기 위해 정성껏 필기도 했다. 그런 언니의 모습을 볼 때면 언니의 무능함이 극대화되는 것 같아서 더욱 답답해지기도 했다.

단순히 회사생활을 못할 것 같은 답답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익숙한 ‘학습’만을 고집하려는 모습으로 보여서 더 답답했다.

공부를 잘한다고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었다. 실무라는 것은 시험으로 임해야 하는 ‘공부’와는 전혀 별개의 일이다.


언니가 처음이어서 아무리 작은 기업의 간단한 업무라도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요는 언니의 태도이다.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언니는 언니의 능력으로 잘하는 모습을 뽐내고 싶어 보였다. 그래서 열심히 노트에 필기도 하고, 내가 빠르게 하면서 누락하는 일부 업무 프로세스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나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비슷한 지적질(?)이 반복될 때에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일의 순서와 그것이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답답해졌다. 그리고 언니는 정작 지시된 업무,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열심히 타자연습만 매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나의 모습이 비치기도 했다. 나 역시 전산처리업무, 회계업무가 초창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렵다고 느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정도 학벌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경력 단절이 되어 안타깝게 이런 일이나 해야 된다니’라고 비통해하며 우울감에 빠지는 것이 문제이다. ‘내가 집에만 있지 않았으면 뭐든 잘했을 거야. 나정도 학벌에 이 정도 회사에서 당연 돋보여야지’ 언니의 진짜 속이야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는 것은 그랬다. 어쩌면 그것은 언니의 속마음이기 이전에 나의 속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는 아이러니하게도 낮은 자존감이었다.

이 낮은 자존감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알량한 자존심, 무능과 연결되는 것으로, 앞의 두 가지가 커질수록 자존감은 더욱 낮아진다. 처음에는 남편의 신분과 지위로 자신의 신분을 잔뜩 상승시켜놓고, 그것이 내 능력인양 포장한다. 한껏 부풀려진 자신의 능력에 가리어져 정작 주어진 작은 일들을 소홀히 여기고 그것이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좌절하면서 자존감이 끝없이 곤두박질치게 된다.


언니는 주어진 업무에 대해 초점을 흐리는 일들이 많았다. 예를 테면, 엑셀에 주어진 룰에 따라 주어진 항목을 입력해야 하는 경우가 있으면, 입력 업무를 하지 않고, 입력될 항목들과 법칙을 열심히 노트 필기해서 공부를 하고 있거나, 안전보건 관련 서류업무를 맡으면 서류업무 자체는 뒷전으로 미루고 안전보건 관련 서적을 열심히 공부하거나 하는 경우 등이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지시를 해야만 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쓴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역시 세진 모터스 입사 초기 나의 모습과 흡사 닮았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그럴 때면 늘 아버지가 나에게 쓴소리를 하기 일쑤였고, 부모를 직장상사로 마주해 매일 쓴소리를 듣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언니의 마음은 나보다 더 비참했을 거다. 남편의 부재로 이미 서러운데, 아기 때부터 알았던 한참 어린 동생을 대표라고 부르는 것 자체도 불편했을 테고, 지시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고 쓴소리까지 들어야 한다니…… 그 가운데 언니의 자존감이 바닥까지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 역시 언니를 세진모터스에서 만나기 전의 나의 모습과 같았다.


언니가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남편의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방어하려고 할수록 언니의 자존감의 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언니의 모습에서 끊임없이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왜 아버지가 그토록 ‘우리 딸이 세상 물정을 좀 알아야지’라고 했는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면서 시부모님이나 친정부모님께 아이를 거의 맡겨본 적이 없다. 내가 낳은 아이는 내가 키우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양가에 육아부담을 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혼자 고군분투하며 아이들을 키워냈는데, 친정부모님이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딸을 불쌍하고 안타깝게 생각할 때면 가슴속에서 서러움이 밀려왔다.


마치 내가 매우 게으르고 능력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것 같아서 깊은 우울감에 빠지기도 했다. 아이도 잘 보고 일도 잘하는 엄친딸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울감을 넘어 억울하기까지 했다.

‘나도 남들 보기에 빠지지 않는 스펙 있다고! 나도 친정부모님이나, 시부모님한테 아이 맡기고 훌쩍 일하러 가고 싶을 정도로 육아도 힘들다고! 그렇게 힘들게 버텨왔는데, 왜 나에 대한 평가는 집에서 노는 엄마냐고!!!’

억울한 생각을 삼키며 상담을 받으러 다녔던 적도 있다.


그런데 아버지의 ‘세상 물정을 좀 알이야지’의 의미가 내가 아이들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어 억울하고 우울했던 포인트와는 별개의 것이었다는 것을 사촌언니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삶의 익숙함에서 올 수 있는 나태함을 경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를 키우는데 전념했던 딸아이의 세월이 헛된 일이라고 본 것이 아니라, 내가 육아에 적응하고 익숙함을 찾아가고 있을 때, 그것에서 끝내지 않고, 집안에서만 키울 수 없는 집 밖에서의 시야와 전투력을 업그레이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혼자서 육아를 책임지는 딸이 자랑스러워, 자신의 자유로운 노후를 은근 주변에 자랑하고 다녔었다. 어머니 역시 양육자로서의 자질을 키워온 딸이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더 역량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언니를 통해 발견한 부정적인 요소는 결국 이 사회가 갖고 있는 선입견, ‘전업주부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가 아니라,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적응력에 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왜 우리 친정부모님은 다른 부모님처럼 아이를 봐주시지 않아서 내가 경력단절이 되었을까? 왜 나는 경력이 단절되어서 폼나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왜 나는 남들처럼 돈이 많은 집에 시집가지 않았을까? 등 내 안에서 싹트던 불만이 나의 삶을 무기력하고 나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촌언니의 경우는 아마도 의사의 아내로 살던 삶을, 홀로서기하는 삶으로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언니는 그래도 정말 노력했다. 일 년 동안 최선을 다했다. 내가 세진 모터스에서 변하고 있었던 것처럼, 언니 역시 세진모터스에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의 모습을 통해 내 모습을 바라보게 된 나는 세진모터스가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유산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언니와 나는 그렇게 세진모터스에서 남의 시선이나 평가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주어진 삶을 철저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진정한 멋짐임을 더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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